석가모니께서 피골이 상접하도록 정진한 6년간의 설산 수도 끝에 깨치신 것은 모든 인간은 佛性을 갖고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생노병사하는 측면에서 동등하여 미물이라도 상호간에 상대를 해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佛性이란 儒家的 입장에서 보면 맹자의 性善說에 해당한다.
심우도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 空의 경지에 이르면 자연으로 돌아가 대중들에게 그 진리를 깨치도록 도와주는 일을 상징적으로 해설한 그림이다. 사찰 외벽에서 소 그림을 보면 진리를 상징한 심우도의 한 장면으로 이해하면 된다. 심우도의 해설은 위 동영상이 자세하다. 신흥사 극락전 심우도 끝에 송광사의 정밀한 그림도 퍼다 싣는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이다. 이 절의 효시는 652년(진덕여왕 6)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향성사이다. 698년 화재로 소실되자 701년 의상(義湘)이 능인암 자리에 향성사를 중건하고 선정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1642년 화재로 다시 소실되자 1644년 혜원·운서·연옥이 중창을 발원하던 중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지으면 삼재가 범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므로 현재의 자리에 절을 짓고 신흥사라고 했다. 1647년에는 대웅전을, 1661년에는 해장전을, 1715년에는 설선당을, 1737년에는 명부전을, 1801년에는 용선전을, 1813년에는 불이문을 세웠다. 1858년에는 벽하가 구월산 패엽사의 16나한을 옮겨 해장전에 봉안한 뒤 응진전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6·25전쟁 때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국가의 지원과 신도들의 시주로 복구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극락보전·명부전·영산전·보제루·시왕전·불이문·설선당 등이 있다. 이밖에 향성사지3층석탑(보물 제443호), 〈은중경언해 恩重經諺解〉, 20여 기의 부도 등이 있다.
四大天王은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神이시다.
朝는 북극성 북두칠성과 관련된 일월성신[日月星辰], 곧 천문학적 우주관에 연원한 생명의 본질론,
鮮은 光明. [첨가] '해'의 sun.
조선이란 범어로 khai-Lasa, Pan-calas(판찰라사)로 해석됨
그 뜻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에 걸쳐 두루두루 광명이 비치는 땅.
단군 이전의 환인천왕, 환웅천왕 시절부터 밤이면 하늘(북극성,북두칠선)과 땅이 만나 생명을 잉태하는 Kuru(마고)를 발원지로 하는 동이족임. 1만년 이전부터. 생명관의 입장에서 朝를 재해석하면 칠성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사는 날까지 살다가[日] 별이 떨어지면(북두칠성의 상징인 칠성판을 덮으면) 별로 돌아갑니다.
흔히 산신각을 미신으로 이해하는 일반인들이 많은데 나는 사찰을 찾으면 산신각 예불을 잊지 않는다. 그곳에는 호랑이를 거느리신 단군 할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실상은 내게 생명을 허락하신 삼신 할매를 뵐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삼신 할매가 계신 곳이 어디냐구요?
무예와 춤과 노래를 특징으로 하는 동이족의 출발지는 북극성 아래 알타이산맥 부근의 마고산으로 보면 됩니다. 중국문명의 뿌리인 요순우 임금도 노자도 동이족이잖아요. 한국의 나주 羅씨도 노자와 同姓입니다. 조상 숭배에 빼어난 유태인들도 동이족입니다. 아담과 이브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의 다른 이름으로 보면 됩니다, 견우라는 이름을 보면 소를 부려 농사를 짓던 분이십니다. 다음 꼭지 글의 심우도와 연결되어 더욱 상쾌한 아침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뜻은 아래와 같습니다.
Adhim 농부
Eve: 직녀(織女)
E - 노래하다. / 한국민요의에헤야데야 노를 저어라
ve - 베짜다 / 직녀(織女)
노아의 노는 배를 젓는 노, 9년 대홍수 때 방주(작은 배)를 만들어 노를 저은뱃사공.
유태인들의 세계관에 의거하면, 페르시아만 위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지역이 여호와께서 천지창조 후 만든 인간들의 태초의 고향인 에덴동산.
회암사의 창건 시기는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 회암사에 원경국사(圓鏡國師)의 글씨가 남아 있다는 언급이 있다. 또한 그 글씨를 본 금나라 사신의 일화에 관한 내용도 전한다. 원경국사(?~1183)는 인종(제17대 왕, 1109~1146, 재위: 1122~1146)의 아들이자 의종(제18대 왕, 1127~1173, 재위: 1146~1170)의 형제인 왕실 출신의 출가자였다. 1147년(명종 4)에 금나라 사신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고 원경국사가 1156년(명종 13)에 입적하였으므로 회암사는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313년(충선왕 5)에는 승려 보우(1301~1382)가 회암사에서 광지에게 출가하였다. 보우는 공민왕대 왕사, 국사를 잇달아 지낸 승려이다. 인종~의종대의 왕자승인 원경국사의 글씨가 남아있고, 명종대 금나라 사신이 다녀간 것으로 보건대 12세기경 회암사는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회암사 중건과 관련하여서는 당대의 유명 문인들이 지은 기문이 전한다. 그중 이색(李穡, 1328~1396)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 에 의하면 나옹의 스승인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指空, ?~1363)이 회암사 지세가 서축(西竺) 난타사(蘭陀寺)와 같아 이곳에 사찰을 일으키면 국운이 도래하고 불법이 재흥한다고 예언한 수기(授記)에 의해 나옹이 중건을 시작하고 그의 제자 윤절간(倫絶磵), 각전(覺田) 등이 완성하였다고 한다.
1344년(충혜왕 후5)에 나옹이 회암사에 머물면서 득도하였다. 이후 그는 원나라로 가서 지공을 만났다. 과거 나옹은 지공이 고려에 왔을 때 그에게 계(戒)를 받아 수지(受持)하였다. 나옹은 원에서 다시 지공을 만나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 일대) 소재의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면서 지공의 밑에 있다가 강남(江南)으로 내려가 저명한 고승들과 교류하였다.
나옹은 1358년(공민왕 7)에 고려로 돌아왔다. 그는 1360년에 공민왕의 요청으로 개경으로 들어와 입궐하여 설법하였는데 후에는 금강산(金剛山), 오대산(五臺山) 일대를 순력하며 지낸다. 공민왕은 불교 교단의 통합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양종오교(兩宗五敎) 승려들을 한 자리에 모아 처음으로 공부선(功夫選)을 시행하였는데 이것을 나옹이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에 나옹은 1370년(공민왕 19)에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서 이루어진 공부선을 주관하고, 법회를 마친 뒤 회암사로 돌아왔다. 공민왕은 다음 해인 1371년에 그를 왕사로 봉하고 당시 선종의 제1도량으로 여겨진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나옹은 송광사에 내려갔으나 그 다음 해인 1372년에 다시 회암사로 돌아온다.
앞서 나옹의 스승인 지공이 고려에 머무른 동안 회암사의 지형을 보고는 서축의 난타사와 같아 이곳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佛法)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하며, 그 터를 측량한 바 있었다. 나옹은 그러한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1374년(공민왕 23)에 회암사의 대대적인 중수를 시작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완성되어 낙성회(洛城會)를 열게 된다.
그러나 이후 회암사에 너무 많은 신도들이 몰리게 되면서 사헌부의 비판을 받았는데 도당(都堂)의 명으로 결국 절의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런데도 회암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자 조정에서는 아예 나옹을 추방한다. 그는 1376년에 밀양 영원사(瑩原寺)로 향하던 중 병으로 신륵사(神勒寺)에서 쉬다가 결국 그곳에서 입적하게 된다.
*한글 창제 이전이어서 우리말을 한자로 표현함. 물론 이두와는 다름.
원효와 요석공주의 아들 설총은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 이두임.
문자는 오랜 세월 동안 그 형태를 변화하여 고착되기 마련인데,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신라시대의 노래인 향가 25수를 표기하지 않나, 세종 시절엔 표음문자인 산스크리어를 모델로 발음기관의 형태를 본떠 28자를 만들지 않나, 그래서 문자를 만든 날짜까지 명기한 걸 보면 한국인의 천재성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이색[李穡]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야은(冶隱)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이곡(李穀)이며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展也禪覺 惟麟之角 전야선각 유린지각 王者之師 人天眼目 왕자지사 인천안목
진실로 선을 깨친 이시며〔禪覺] 기린의 뿔이로다* '코뿔소의 외뿔'의 표현인 듯. 기린은 두 뿔이니까. 임금의 스승이요 인천(人天)의 눈이로다. *人天 - 인간세계와 천상세계
萬衲宗之 如水赴壑 만납종지 여수부학 而鮮克知 所立之卓 이선극지 소립지탁
뭇 승려들 우러러보기를 물이 골짜기로 달리는 듯하나 선 바가 우뚝하여 아는 이가 드물다
隼夢赫靈 在厥初生 준몽혁령 재궐초생 龍神護喪 終然允藏 롱신호상 종연윤장
신령한 새매 꿈이 처음 태어날 때 있었고 용신 (龍神) 이 초상을 호위함하여 마지막 죽음을 빛냈도다
矧曰舍利 表其靈異 신왈사리 표기령리 江之闊矣 皎皎明月 강지활의 교교명월
하물며 사리라는 것이 스님의 신령함을 나타냈나니 강은 넓게 트였는데 달은 밝고 밟았도다
空耶色耶 上下洞徹 공야색야 상하동철 哉高風終 終古不滅 재고풍종 종고부멸
공(空)인가 색(色)인가 위아래가 훤히 트였나니 아득하여라, 높은 모습이여 길이 소멸치 않으리라.
[참고]만해 한룡운 선생의 제자이신 춘성[春城] 스님은 사리 같은 나의 자취를 남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상은 소멸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니까요. 부처님의 다비식에서 여러 나라의 왕들이 나눠 가져간 것은 덜 태운 부처님의 뼈조각이엇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사리탑이 생겼고, 불상이 조성된 것은 서력 기원 이후입니다.
◾ 팔만대장경 :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불교 경전을 새긴 나무판으로 불경(佛經)의 총칭이다. 합천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국보 제32호이며, 세계기록유산이다.
◾보살(菩薩) : 불교사전에 의하면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함.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부처님 다음가는 성인(聖人)” 이라는 뜻도 있다.
◾ 보리(菩提) : 불교에서 최상의 이상(理想)인 불타정각의 지혜 즉 깨달음을 의미한다.
◾ 여래(如來) : 석가여래 즉 부처님을 의미함
◾ 지장보살 : 석가 입멸(入滅)후 미륵불의 출세(出世)까지 무불의 세계에 머물러 중생을 화도(化導)한다는 보살
◾문수보살 : 여래의 좌편에 있어 지혜를 지니어 맡은 보살. 법신(法身), 반야(般若), 해탈(解脫))의 삼덕(三德)을 갖추고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지혜로 불도중에는 부모에 해당하는 보살
◾ 보현보살 : 불타(佛陀)의 이(理), 정(定), 행(行)의 덕을 맡아 보는 보살
◾ 오백나한 : 여래가 입멸한 뒤 “유고결집(遺敎結集)” 때 모였던 五百人의 아라한(阿羅漢 :소승불교의 수행자가 오료도달(悟了到達)하는 최고지위)
◾ 팔만가람 : 팔은 八方(온세상)을 의미하고 만(萬)은 “많다”는 의미이다, 가람(伽藍)은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즉 “세상의 수많은 사찰”을 뜻한다.
◾서방정토 : 불교에서 멀리 서쪽에 존재한다는 아미타불의 세계. 즉 극락정토(이상향)을 말함
◾ 극락세계 : 아미타불이 살고있는 극락정토의 세계. 지극히 안락하고 아무걱정없어 행복한 세계(金色世界라고도 함)
◾관세음보살 : 대자대비(大慈大悲 : 그지없이 넓고 큰 자비로움)하여 중생이 괴로울 때 정성으로 그 이름을 외면 곧 구제(救濟)한다는 보살 (“관음보살” 이라고 함)
◾남무(南無) : “나무”로 읽는 범어(梵語). 돌아가 의지(依支)한다는 뜻
◾아미타불 : 서방정토에 있다고 하는 부처님.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이 부처를 모시면 죽은 뒤에 극락세계로 간다고 함(無量光佛이라고도 함)
◾환토상봉 : 죽은 뒤 환생하여 다시 고토(故土: 고향)에 돌아와 다시 만남
◾ 사신보시 : 수행보은(修行報恩)을 위하여 속세(俗世)에서의 몸을 버리고 불문(佛文)에 들어감.
경기도양주시천보산에 위치했던 사찰.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한 조선왕조에서도 왕과 왕후들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의 왕사'라고 불렸던 조선 최대의 절이었다. 행궁으로도 기능했으므로 그 모습이 궁궐 건축에 가까웠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폐사되어 지금은 터만 남았다. 숭유억불 정책과 관련된 좋은 예시이다. 19세기에 이 절터 근처에 재건한 작은 회암사가 남아있다.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명종 4년(1174)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왔다 갔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있으므로, 회암사가 그 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 사람 지공(指空)화상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 날란다)를 본떠 266칸짜리 거대한 사찰로 중창했다고 한다. 충목왕 즉위년(1344)에 나옹(懶翁) 화상(1320-1376)이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다. 우왕 2년(1376)에 나옹이 회암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중창하였으나, 이 일로 탄핵을 받아 경남밀양시 영원사(靈源寺)로 가던 도중 경기도 여주시신륵사에서 숨을 거두었다.[1]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매우 아꼈다.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서 수도생활까지 했을 정도. 비록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었지만 그 자신은 유학자 출신이 아니었으며, 불교 문화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 인물인지라 불교를 좋아하였다. 반면 불교를 싫어한 태종 이방원은 불교가 국가 운영에 끼어들지 못하게 본격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했지만 재위 중 원경왕후가 병에 걸리자 승려들을 불러모아 '니들 평소에 그리 연마하는 도가 얼마나 효엄있는지 보자. 만약 아무 효과도 없으면 불교는 그날로 조선에서 완전히 박멸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아 승려들은 정말 내일이 없다는 심정으로 절박히 기도해서 원경왕후가 어느 정도 병세가 완화되자 태종은 회암사에 땅과 곡식을 내려주는 걸로 답례를 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독실한 불자였던 세조 등에 힘입어 회암사도 계속 번창하였다. 성종 3년(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숭유억불 정책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많은 왕족들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다. 조선 초기는 왕의 권력이 신하들보다 더 강했기에, 국왕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반대하는 신료들을 누르고 사찰을 지원할 수 있었다.
또한 회암사는 선대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찰이므로 석왕사처럼 더욱 특별히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아무리 유교적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도, 한번 왕실의 전통으로 정착하면 단지 '왕실의 전통'이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명분을 획득하였다. "유교에 어긋나기는 하는데, 역대 선대왕님들도 인정하셨고 손 안 대셨잖아. 그러고도 선대왕들께서 잘못하셨다고 주장하냐?" 하고 물었을 때, "선대왕들께서 잘못하셨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신하는 거의 없었다.[2] 아무리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선대왕들의 품위를 지켜가며 공격해야 하니 논쟁에서 불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신하들,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경해지자 회암사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왕실 사찰'로 기능하는 이 거대한 절이, 조선 유학자들의 눈에는 마치 레이드 떠야 할 보스급 몬스터처럼 보였을 것이다. 유생들은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리며 회암사를 공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