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지나 영산강 지나서 가자 친구여 西海바다 그 푸른꿈 지나 언제나 그리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창밖엔 밤새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 친구여 바다가 몹시도 그리운 날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간주)
하이얀 뭉게구름 저멀리 흐르고 외로움 짙어가면 친구여 바다소나물 사잇길로 가자 늘리보다 더 외로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압해도 사람들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이마받이을 하고 문득 눈을 들면 사람보다 더 놀란 압해도 귀가 없는 압해도 반 고호의 마을로 가는지 뿔테 안경의 아이들이 부는 휘파람 소리 일렬로 늘어선 풀들이 깨금발로 돌아다니고 집집의 지붕마다 귀가 잘려 사시사철 한쪽 귀로만 풀들이 피는 나지막한 마을
작은 창문을 돋보기처럼 매단 늙은 우체국을 지나가면 청마가 생각난다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창유리 앞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는 청마 고층 빌딩들이 라면 상자처럼 차곡차곡 쌓여있는 머나먼 하늘나라 우체국에서 그는 오늘도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쓰고 있을까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라고 우체국 옆 기찻길로 화물열차가 납작하게 기어간다 푯말도 없는 단선 철길이 인생이라는 경적을 울리며 온몸으로 굴러간다 덜커덩거리며 제 갈 길 가는 바퀴 소리에 너는 가슴 아리다고 했지 명도 낮은 누런 햇살 든 반지하에서 너는 통점 문자 박힌 그리움을 시집처럼 펼쳐놓고 있겠다 미처 부치지 못한 푸른 편지를 들고 별들은 창문에 밤늦도록 찰랑이며 떠 있겠다
K읍기행(K邑紀行)
ㅡ 노향림
오랜만에 만나는 분위기.
하나의 선(線)이 되어 평야(平野)가 드러눕는다.
일대(一帶)는 무우밭이 되어
회색집들을 드문 드문
햇볕 속에 묻어 놓고
몇 트럭씩
논밭으로 실려나가는
묶인 고뇌(苦惱)와
고장난 시간(時間)들
지나다 보면
낯이 선 사투리들이
발길에 툭 툭 채였다.
길가 사람들 속에서
구부정한 말채나무가
혼자 목을 쳐들고.
할 일 없이 혼자 쳐들고 있다.
[시인의 말]
시인이란 바꾸어 말하면 꿈꾸는 사람이다. 그들은 아름답고 바른 삶을 꿈꾸며, 향기가 우러나는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그 꿈꾸기를 뒤집어보면 우리의 삶이 아름답지도 못하고 바르지도 못하다는 어두운 실상이 나타난다.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떨어져 있는 슬픔이며 서로 알지 못하는 낯설음임을 깨우치게 된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수석으로 입학·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윤동주 시인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28세에 홍익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되었고, 1984년부터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지내며, 한국 문학의 지나친 교훈성과 위선을 비판하고 풍자하였다. 1991년 출판한 《즐거운 사라》의 외설 논란으로 1992년 강의 도중 구속되고, 1995년 대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되어 연세대학교 교수직에서 해직됐다가 1998년 특별사면을 받았다. 2002년 복직하여 2007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전공 정교수가 됐고, 2016년 정년퇴임했다. 2017년 등단 40년을 맞아 시선집 《마광수 시선》을 펴냈으나, 자택에서 홀로 별세하였다.
문화인류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추상적인 가치 대신 즉물적인 대상을 쫓는 것을 말한다. 혹은, 이런 용도로 만들어진 물품들을 페티시라고 한다. 이름의 유례는 라틴어의 "facticius"(만들어진 물건)에서 포르투갈어의 feitiço, 불어의 fétiche로 이어져 영단어가 된 것. "주술용품"이나 "부적"을 의미한다.
영적 연결의 매개체나 연결 그 자체를 상징하는 토템과 달리 페티시는 그냥 그 자체로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물품들로써 토템과는 전혀 다르다. 토템과 페티시 모두 무언가 소유자나 숭배자에게 힘을 주는 물건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용어를 혼동하기 쉬운데, 그 힘의 근원이 전혀 딴판이기 때문에 확실히 구분하는 것이 옳다.
페티시를 만들고 그것에서 힘을 취하는 것을 숭상하는 페티시즘은 서아프리카 등지에서 특히 유행하는 원시적 종교인데, 특정 물적대상에 대한 주술적 숭배 및 그 대상물이란 점에서 토템과 비슷하나 페티시는 그냥 숭상 받는 대상이기 때문에 의외로 엄밀한 의미로써의 페티시즘은 그리 흔하지 않다.
사실, 토테미즘 또한 엄밀한 토테미즘[1]은 별로 없고 애니미즘이 토템의 형태로 구현된 경우가 많은데, 이런 '토템'들은 또 '편리화' 되어 페티시로 위장 중인 경우가 아주 흔하다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대충 숭상받는 페티시형 '토템'[2]은 지구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한반도의 무속 신앙도 어느정도 페티시적 요소가 가미된 토테미즘이 섞인 애니미즘이다. 이런 토속 신앙이 아닌 좀더 조직화된 종교들도, 더 고도로 조직화됨에 따라, 토템으로 변경된 애니미즘 요소가 페티시 형태로 변형 내지 위장하여 흔적으로 남는 모습을 보인다. 크리스트교에도 고전 사도 교회에서는 소위 "성물"이라 하여 딱히 교리적 이유는 없지만[3] 대충 영험하거나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물품들, 주로, 이름난 성인이나 성자의 신체 부위, "진짜 십자가의 파편"이나 "진짜 수의의 조각" 등을 성전에서 소중히 보관하고 신도들이 이를 숭배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것에 영험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도 한다.
이것은 애니미즘적 다신교의 토템들이 '편리 기복화' 되어 페티시 비슷한 것으로 전락하여 크리스트교에 흡수된 것으로, 유대교 시절에서도 발견된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질서가 멀쩡하던 시기에도 '페티시' 처럼 활용되는 우상들이 널려 있었다고 꾸준히 언급된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무너져서 애니미즘이 유입되면[4] 이 '페티시'로 쓰이는 '우상'이 '토템' 기능을 가지게 되는데, 그 순간 이스라엘에 큰 재앙이 일어난다.) 그런데 기독교로 오고 나면 이 우상들을 더 이상 '토템'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5], 이것은 그 뒷편에 있는 '애니미즘' 자체를 완전 부정하여 '우상'들은 신으로써의 가치가 없으므로 애초에 신이 아니라고 못 박는 태도이다.
성도착증의 일종으로서무정물[1],생식활동과 무관한 신체 일부(특히발등.발 페티시문서로.),신체에서 사출된 분비물 등에서 성적 흥분을 얻는 것을 말한다.[2][3]때문에 우리말 정신의학 용어로는 절편음란증, 물품음란증 같은 학문적인 명칭이 붙어있다. 물론 절편음란증에서 절편은 잘라낸 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가 아닌 신체 일부 부위(발 등)만을 성적 대상으로 한다는 의미이다. 물품음란증의 의미는 자명할 것이고.
간혹 신체 부위가 아닌 무정물에 대한 성애만 페티시즘이라고 한다고 아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오해다. 정신과적 입장에선 생식활동과 무관한 신체 부위(예를 들어 발, 머리카락 등)에 대한 성적 흥분을 파셜리즘(Partialism)이라고 하여 무생물에 대한 성적흥분과 묶어 성적 페티시즘이라고 부른다.[4]
절편음란증, 물품음란증이라는 명칭을 보면 알겠지만, 정신의학에서는 신체 일부나 무정물에 흥분할 때만 성적 페티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특정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사람에 대한 성애, 동물이나 어린이 등 유정물에 대한 성애,노출증같은 성적 행위의 방법에 대한 성애는 정신의학에선 페티시즘으로 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XX 페티시즘'이란 표현이 흔히 남용되기에 혼동하는 것이다.[5]
DSM-5에서는 이상성벽(Paraphilic Disorder) 분류에서 아래의 여러가지 성벽들을 기타 이상성벽(Paraphilic Disorders Not Elsewhere Classified)으로 몰아 넣었다. 실제로 각각의 개별 성벽의 문헌 보고가 극히 소수만이 존재할 정도로 마이너한 성벽도 많다.
압해도 사람들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이마받이을 하고 문득 눈을 들면 사람보다 더 놀란 압해도 귀가 없는 압해도 반 고호의 마을로 가는지 뿔테 안경의 아이들이 부는 휘파람 소리 일렬로 늘어선 풀들이 깨금발로 돌아다니고 집집의 지붕마다 귀가 잘려 사시사철 한쪽 귀로만 풀들이 피는 나지막한 마을
섬진강을 지나 영산강 지나서 가자 친구여 西海바다 그 푸른꿈 지나 언제나 그리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창밖엔 밤새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 친구여 바다가 몹시도 그리운 날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간주)
하이얀 뭉게구름 저멀리 흐르고 외로움 짙어가면 친구여 바다소나물 사잇길로 가자 늘리보다 더 외로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전남 신안 앞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섬인 압해도에 관한 80여편의 시 를 발표한 시인 씨의 시세계를 기리는 기념탑 건립이 압해도 주 민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압해면장과 재경 압해향우회장 등이 중심 이 된 「시비 건립추진위원회」는 자신들의 고향인 압해도를 시향 으로 삼아 노래한 시인을 기리는 탑을 주민들의 뜻을 모아 세우기로 하 고, 10월5일 현지에서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건립추진위원회는 『시인의 연작시 「압해도」는 압해도 사람들에게 자 긍심을 갖게 하고, 우리 고향의 청소년들에겐 문학적으로 신선한 자극 이 될 것』이라고 건립취지를 밝혔다. 노씨는 『어린시절 목포 산정동 산 기슭에서 내려다 보이는 압해도를 바라보며 상상의 섬, 즉 이상향의 세 계를 꿈꾸었다』며, 『이 그리움은 그 이후 제 마음에 자리잡은 「시원의 공간」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K읍기행(K邑紀行)
ㅡ 노향림
오랜만에 만나는 분위기.
하나의 선(線)이 되어 평야(平野)가 드러눕는다.
일대(一帶)는 무우밭이 되어
회색집들을 드문 드문
햇볕 속에 묻어 놓고
몇 트럭씩
논밭으로 실려나가는
묶인 고뇌(苦惱)와
고장난 시간(時間)들
지나다 보면
낯이 선 사투리들이
발길에 툭 툭 채였다.
길가 사람들 속에서
구부정한 말채나무가
혼자 목을 쳐들고.
할 일 없이 혼자 쳐들고 있다.
[시인의 말]
시인이란 바꾸어 말하면 꿈꾸는 사람이다. 그들은 아름답고 바른 삶을 꿈꾸며, 향기가 우러나는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그 꿈꾸기를 뒤집어보면 우리의 삶이 아름답지도 못하고 바르지도 못하다는 어두운 실상이 나타난다.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떨어져 있는 슬픔이며 서로 알지 못하는 낯설음임을 깨우치게 된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평안남도숙천에서 출생하였고[2]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강동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훗날 평안남도 평양에서 잠시 자라다가 1946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월남하였다. 서울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나왔다. 1958년 《현대문학》에 시 〈10월〉,〈동백나무〉,〈즐거운 편지〉 등을 추천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한밤으로〉,〈겨울의 노래〉,〈얼음의 비밀〉 등의 역작을 발표했으며, 이러한 초기 시들은 첫 번째 시집 《어떤 개인 날》에 수록되어 있다. 이어 두 번째 시집 《비가(悲歌)》, 3인 시집 《평균율》을 간행하였고 《사계(四季)》의 동인으로 활약했다. 그 밖의 시집으로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풍장(風葬)》 등이 있다. 1968년 현대문학신인상, 1980년한국문학상을 수상했다. 황동규의 시는 전통적인 한국 서정시의 강한 편향성과 서정성에서 벗어나 1950년대 이후의 현대시사 위에 독자적인 맥락을 형성한 것으로 보이며 독특한 양식적인 특성과 기법으로 인해 현대시의 방법적, 인식적 지평을 확대해 놓았다는 점에서 동시대 비평계의 지속적인 관심과 평가를 받아오고 있다.[3]
황동규 시인은 1938년 평남 숙천(肅川)에서 소설가 황순원의 맏아들로 태어나 1946년 가족과 함께 월남해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울고 졸업 후 서울대 영어영문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따고 영국 에든버러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1968년부터 서울대 영문학 교수로 재임했다.
1958년 미당 서정주에 의해 시 ‘시월’ ‘동백나무’ ‘즐거운 편지’가 ‘현대문학’에 추천돼 시인으로 등단했다. ‘어떤 개인 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꽃의 고요’ ‘겨울밤 0시 5분’ ‘사는 기쁨’ ‘연옥의 봄’ 등의 시집을 펴냈다. 현대문학상·대산문학상·미당문학상·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와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인은 아버지 황순원에 대해 말할 때 늘 ‘체험의 공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랬다.
내 세상 뜨면 풍장(風葬)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 우고 옷 벗기 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 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시인 황동규, <풍장> 연작 완결…70편짜리 ‘생사의 교향악’
우리 시대 대표적 시인 황동규씨가 82년에 시작한 <풍장> 연작이 95년 가을 70편으로 완결되었다.
살아 있는 모든 자에게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온다. 산 자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공포이며, 심연을 알 수 없는 어둠이다. 그 공포와 어둠으로 인간을 몰아가는 것은 질병이나 자동차 사고가 아니라 시간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소멸로 인도하는 시간에 저항한다.
제의(祭衣), 종교 혹은 문명 전체가 시간에 대해 인간이 저항하는 형태이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시간에 대한 저항이 없다면 우리의 삶에서 어떤 형태의 완성도 찾아볼 수 없다.
영원한 암적(暗寂), 끝없는 무(無), 흐느적거리는 권태일 뿐이다.
죽음은 삶을 유한적 존재로 한정하지만, 그 한정으로 인해 삶은 권태를 벗어나 찬란한 완성이 된다.
어둠이 있음으로 해서 빛이 존재하듯이.
82년,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풍장1>)
로 첫 걸음을 내디딘 <풍장> 연작은 바로 관념의 죽음에서 벗어나 죽음을 길들이기 위한, 삶과 죽음의 내밀한 교접을 통해 삶의 유한성을 찬란하게 만들기 위한, 시인 황동규의 긴 여정이다.
풍장(風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비바람에 시신이 육탈하기를 기다린 후에 매장하는 우리나라 서남해 도서 지방의 독특한 장례법이 아니던가. 그 풍장이 시인에게 ‘삶 자체의 알레고리’로 보였던 것이다.
삶이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면, 풍장은 구체적으로 죽음의 경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풍장은 죽음에 이르는 우리의 삶으로 시인에게 은유된 것이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풍장1>)에서 보는 것처럼 초기 <풍장> 연작은 대체로 죽음을 찾아나서서 죽음과 맞대결하려는 시인의 강렬한 의지가 엿보였다.
이 때가 40대 중반, 일반적으로 의식 속에서 죽음이 만져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아니던가.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죽음을 찾아나서서 그놈의 실체를 보자는 것.
그것은 죽음과의 대결이지만 ‘죽음 길들이기’‘죽음과의 친화’이기도 하다.
이 죽음과의 친화는 <풍장> 연작 중기로 오면 삶과의 친화, 생명에 대한 환희로 변주된다.
이 질적 변화는 죽음과의 대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일 것이다.
풍장37
땅 속에 발목뼈 채 묻히지 못해
한없이 떠도는 원혼(寃混)이 된들 어떠리.
원혼 가운데서도
새처럼 가벼운 원혼,
슬피 울지도 못하고
잠투정하듯
초저녁에 잠시 우는,
울다 문득 고막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풍장37> 전문)
원혼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다. 이처럼 <풍장> 연작 중기에 오면 시인 황동규는 죽음 길들이기와 죽음 긍정을 통해 삶의 유한성을 극복하여 삶의 정신적 자재(自在)에 이른다.
후반기 <풍장>에는 삶과 죽음의 이원론이 완전히 지양되고 삶과 죽음의 동시적 긍정이, 그 둘의 경계 없음이, 그 무화(無化)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그것은 세속적 시간의 초월이 아니라 끌어안기다. 그리하여 시인에게 끌어안긴 죽음과 삶은, 그것을 구분하는 시간은 ‘꿈도 없이’ 편안하게 졸 수 있다.
황동규의 <풍장> 연작 70편은 죽음과 삶의 쟁투에서 그것들의 화평에 이르는 드라마틱한 여정이다. 이 화평이 우리에게 영생 (永生)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사술(邪術)일 뿐이다. 황동규의 시집 <풍장>(문학과지성사)은 우리 삶의 유한함의 아름다움과, 죽음을 감싸안으면서도 우리의 존재를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의식의 자재(自在)를 보여준다.
그래서 세상을 ‘군침 돌게’ 해 준다.
하응백 (문학 평론가·경희대 국문과 교수) 시사저널 1995. 10. 19
The time we have left
How does it matter the time we have left,
We'll have the chance to grow old together :
My tenderness will live in the deep of your eyes,
Your youth will live in the deep of my heart.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우리가 함께 늙어가는 건 행운이야
당신의 눈동자에 나의 사랑이 담겨있고
내 마음 깊은 곳에 당신의 청춘이 살아 있으니
Like a prayer from childhood,
these words on your lips give me faith.
I can imagine us, your hand in mine,
our smallest smiles will mean I love you.
어린 시절의 기도처럼
당신의 입술에 감도는 말은 나에게 믿음을 주고
난 당신이 내 손을 잡는 상상을 하고
우리의 엷은 미소조차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듯.
But one of us will leave first,
And close his eyes forever
With a final smile.
And the other, losing half his life,
Will remain in the night every day.
His heart of course will beat,
But for whom ? But why ?
하지만 우리 중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마지막 미소를 머금은채
영원히 눈을 감는다면
남은 사람은 남은 인생의 반절은 잃어 버린 채
매일 어둠속에서 지내게 될거야.
그의 가슴은 뛰겠지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뛰는가
Your step sounds, the door opens,
My heart beats faster and I find you again.
When our hands are holding I forget about everything else,
I feel like time itself has stopped.
당신의 발걸음 소리가 문틈으로 들려오면
내 심장은 더 빨리 뛰고 당신을 되찾겠지
우리가 서로 손을 잡는 순간 나는 다른 모든 것을 망각한채
시간이 멈추었다 느끼겠지
But one of us will leave first,
And close his eyes forever
With a final smile.
One day one of us will be too tired,
And, almost happy, will leave first
And the other, without delay, will follow.
하지만 우리 중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마지막 미소를 머금은채 영원히 눈을 감는다면
어느날 남은 한 사람이 매우 피곤해져서
행복하게 세상을 떠나서
남은 사람은 이 세상에 지체하다가 그를 찾아 떠나겠지.
I can imagine us, your hand in mine,
our smallest smiles will mean I love you.
나는 내 손에 쥐어져 있던 당신 손을 기억하지
우리의 엷은 미소는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라네
[가사출처] 아름다운미술관cafe
그의 가슴은 뛰겠지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뛰는가 ’ ☜ 이건 무슨 뜻일까?
풍장(風葬) 2
ㅡ 黃東奎 (1938 ~ 1995)
아 색깔의 장마비! 바람 속에 판자 휘듯 목이 뒤틀려 퀭하니 눈뜨고 바라보는 저 옷벗는 색깔들 흙과 담싼 모래 그 너머 바다빛 바다! 그 위에 떠다니는 가을 햇빛의 알갱이들
소주가 소주에 취해 술의 숨길 되듯 바싹 마른 몸이 마름에 취해 색깔의 바람 속에 둥실 떠……
3
희미한 길 하나 골목에 들어가 길 잃었다가
환한 한길로 열리듯 아픈 이 하나 턱 속에 사라졌다가 바람 불 때 확하고 뇌 속으로 타오르듯이
세상이 세워지다 말고 헐리다 말고 외롭다 말고, 세상이 우리 모여 떠들던 광교의 술집과 잠 못 들다 홀로 몸 붙이고 잠든 방 사이 어디선가 타오른다
인왕산일까 남산쯤 혹은 낙산 그 너머일까 낙산 밑에 밀주 팔던 그 술집일까 안방에 담요 뒤집어 쓰고 화끈 달던 술항아리일까 혹은 우리들보다 더 뜨거운 우리의 골목일까 그런 골목, 우리 코트 버리고 웃옷 벗어 머리에 쓰고 허리 낮추고 타는 마루를 빠져나와 마당을 빠져나와 대문턱에 걸려 넘어져 엎어진 채로 세상이 마르고, 세상을 태우고, 세상에 물뿌리는 소리를 듣는다
황동규 시인(78)의 ‘연옥의 봄’(사진) 연작은 자연스럽게 ‘풍장(風葬)’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이 40대에 쓴 ‘풍장’ 연작도 ‘연옥의 봄’처럼 죽음에 대한 시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손목에 달아 놓고/아주 춥지는 않게/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전자시계보다 진보한, 휴대전화와 함께하겠다는 변화 외에도 70대의 시인이 쓴 ‘연옥의 봄’은 ‘풍장’보다 명랑하다.
죽음이 이렇게 밝을 수 있을까. 그가 처한 나이는 가까운 벗들을 하나둘 떠나보내는, 소멸을 피부로 느끼는 때다. 실제로 새 시집엔 시인이 직접 부대낀 죽음의 장면들이 눈에 띈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문우(文友) 김치수 평론가의 병상을 찾은 시간을 회고하며 쓴 ‘발’, 여행 중에 아끼던 제자의 부고를 듣고 쓴 ‘그믐밤’ 등이 그렇다. 그런데 그 시편들이 슬프거나 쓸쓸하지 않고 쾌활하다.
5일 서울대 명예교수연구동에서 만난 시인은 “‘풍장’을 쓸 때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습을 많이 한 셈”이라며 “예전보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더라. 죽음에 대해 관대해졌다”고 말했다.
‘연옥의 봄’은 열여섯 번째 시집이다. 그는 3, 4년마다 새 시집을 펴냈다. 시의 활력이 늘 넘쳤을 것 같은 그이지만, 오랫동안 강단에 섰던 시인은 교수로 일하면서 시를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예술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기에 가르치는 것과 예술 하는 것은 싸울 수밖에 없어서”였다.
그는 “오히려 은퇴하고 쓴 시가 더 좋다는 얘기도 많이 듣는다”고 했다. “전에는 시어(詩語)가 탁탁 나왔는데 이제는 시어를 찾고 고민해서 써야 한다”며 변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닳고 닳은 문지방 너머로 나이 든 삽살이 하나가 다가와/’어떻게 오셨습니까?’/ 목에 줄만 없었다면 머리 쓰다듬고 같이 들어가/주인과 인사 나누고 잠시 툇마루에 걸터앉아/오가는 생각들을 하나씩 둘씩 뭉개고 싶은 곳./모르는 새 너와 나가 사라지고/ 마당과 가을빛만 남는다’(‘북촌’)
기러기: 1951년 출간된 단편집의 표제작이다. 이외에도 <별>, <산골아이>, <그늘>, <저녁놀>, <병든 나비>, <애>, <황노인>, <머리>, <세레나데>, <노새>, <맹산할머니>, <물 한 모금>, <독 짓는 늙은이>, <눈> 등 총 1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나기: 원제는 소녀少女. 해당 작품 자체는 소나기가 1953년 5월 '신문학'에 먼저 발표하였지만, 원본은 1953년 11월 '협동'에 발표된 소녀라는 연구결과가 한성대 김동환 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다. 하지만 반론도 있다. 그 근거와 차이점, 반론은 앞의 신문기사를 참조할 것.
신들의 주사위
움직이는 성: 1973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카인의 후예: 195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그동안 '단편만 잘 쓴다'고 알려진 황순원이 장편도 잘 쓸 수 있음을 보여준 명작이다.
학: 1956년 이를 표제작으로 하여 단편집으로 출간되었다. <학>을 비롯하여 <왕모래>, <소나기>, <맹아원에서>, <청산가리>, <참외>, <부끄러움>, <몰이꾼>, <매>, <여인들>, <사나이>, <두메>, <필묵장수>, <과부> 등 14편이 수록되어 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1]', '라이너 마리아 릴케[2]'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1941. 11. 5.)
우리가 어느 별에서
ㅡ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랑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 시집 《서울의 예수》(1982) 수록
낙엽끼리 모여 산다
ㅡ 조병화(趙炳華)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 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 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
별 하나 ㅡ 김용택 당신이 어두우시면 저도 어두워요 당신이 밝으시면 저도 밝아요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있든 내게 당신은 닿아 있으니까요 힘내시어요 나는 힘 없지만 내 사랑은 힘 있으리라 믿어요 내 귀한 당신께 햇살 가득하시길 당신 발걸음 힘차고 날래시길 빌어드려요 그러면서 그러시면서 언제나 당신 따르는 별 하나 있는 줄 생각해 내시어 가끔가끔 하늘 쳐다보시어요 거기 나는 까만 하늘에 그냥 깜박거릴게요.
별 키우기
ㅡ문정희(1947- )
나만의 별 하나를 키우고 싶다
밤마다 홀로 기대고 울 수 있는 별
내 가슴속 가장 깊은 벼랑에 매달아 두고 싶다 사시사철 눈부시게 파득이게 하고 싶다
울지 마라, 바람 부는 날도
별이 떠 있으면 슬픔도 향기롭다
가을의 기도 ㅡ 이해인 (1945- )
가을이여 어서 오세요 가을 가을 하고 부르는 동안 나는 금방 흰 구름을 닮은 가을의 시인이 되어 기도의 말을 마음 속에 적어봅니다
가을엔 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잡아 그리움의 기도로 키우며 노래하길 원합니다
하루하루를 늘 기도로 시작하고 세상 만물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