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문순옥 결혼 사진 

 

 

https://www.youtube.com/watch?v=4jETSJz0X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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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천상병 귀천과 새

그날은-새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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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출처- [새] 조광출판사(1971)

 

 

https://blog.daum.net/mun6144/5444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

천상병(1930-1993) 시인은 1967년 6월 25일,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6개월 동안 세 차례의 전기고문 등 숱한 고문을 받았다. “간첩인 친구 강빈구에게 공포감을 조성해 500원,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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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1930-1993) 시인은 1967년 6월 25일,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6개월 동안 세 차례의 전기고문 등 숱한 고문을 받았다.

“간첩인 친구 강빈구에게 공포감을 조성해 500원, 1000원씩 받아쓰면서도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앙중보부의 주장(불고지죄, 국가보안법 위반, 공갈죄)이었다.

훗날 그는 당시의 고초를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그 날은 새, 1971)이라고 한 바 있다.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이 연루됐다던 그 사건은 2006년 과거사 진실위원회에서

"중앙중보부가 과장한 것으로 정부는 관련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정의했다.

고문은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마저 파괴했다.

재판정 뒷줄에 서 있는 피고 천상병의 모습이 평소의 그와 같지 않게 비감하다.

다리미에 눌렸던 그는 그의 ‘아름다운 소풍’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이라도 한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사건을 겪은 후 그는 실종과 정신병원 입원 그리고 가난 속에서 살다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한 채 하늘로 돌아갔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skywind2018&logNo=221394448283 

 

시인 천상병 귀천과 새

그날은-새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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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ㅡ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재록합니다.

 

그날은

ㅡ 천상병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 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67년에 어이없게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정도 옥고를 치른 그는
죽을 때까지 다른 직업 없이 오직 시인으로 살아간다.

 

[참고]천상병의 아내

알려진대로 천상병 시인의 아내 문순옥 씨는 원래 천 시인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여고생 때 천 시인을 만난 문씨는 오빠처럼 천재 시인을 따랐는데,
천상병 시인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동백림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 풀려나게 된다.
그 후 천 시인은 술에 의지해 살았고, 하루는 쓰러져 길에 누워 있다가
행려병자로 분류되어 정신병원에 끌려가기도 했다.
문순옥 씨를 비롯한 지인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그의 유고시집을
내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지만 마침내 그를 병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천상병 시인은 문순옥 씨의 극진한 간호 끝에 건강을 얼마간 되찾았다.
퇴원 후 두 사람은 결혼했다. 

93년 천상병 시인이 타계할 때까지 21년 동안 문순옥 씨의 헌신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대소변을 못 가려 기저귀를 차고 있던 남편을 돌보고 씻기고
인사동에 ‘귀천’이라는 찻집을 열어 시를 쓸 수 있도록 밤낮으로 뒷바라지했다.
기행을 일삼는 남편을 ‘아이처럼 천진하고 사랑스럽다’며 끝까지 사랑한 그녀였다.
문순옥 씨는 남편이 하늘나라로 돌아간 후에도 인사동의 찻집 ‘귀천’을 운영하며
천상병 시인 관련 기념사업을 주관해 왔다.

부인 문순옥(文順玉 1935~2010) 여사는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오빠 친구였던 천 시인과 1972년 결혼했으며 평생을 무직으로 살았던
천 시인의 뒷바라지를 했다.
1985년부터 인사동에서 전통찻집인 '귀천'을 운영했으며, 천 시인이 별세한 뒤
2008년 천상병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고인을 추모하는 작업을 해왔다.
2010년 8월 10일 별세한다.

* 찻집 '귀천'은 인사동의 명소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DliQu-JJFI 

 

 

https://www.youtube.com/watch?v=7rBumHxP4Rg 

 

소릉조(小陵調)

     - 70년 추일(秋日)에 -

ㅡ 천상병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시집 <새>(1971) -

 

 

https://kydong77.tistory.com/18534

 

상주 함창 공갈못에/ 상주아리랑, 명주 길쌈

공갈못 소재지: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 https://www.youtube.com/watch?v=-DgErZN4_0Y https://kydong77.tistory.com/manage/newpost/18534?type=post&returnURL=https%3A%2F%2Fkydong77.tistory.com%2Fmanage%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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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Z0Cc_I6Yc24 

*가사 표기중 '뺌이'는 '배미'의 잘못임.

'배미'는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의 구획을 이르는 말로 논두렁을 뜻한다. 토지구획정리 이전의 왕년의 논두렁이 뱀처럼 구불구불했던 데서 생겨난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mLMJkcYQ3BM 

박수관 - 상주모내기

http://kydong77.tistory.com/14481

①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큰 아가
연밥 줄밥 내 따 주마 우리 부모 모셔(섬겨)다오.

② 이 배미 저 배미 다 심어 놓고 또 한 배미가 남았구나.
지가야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지.

③ 고초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만 못 하더라.
나도야 죽어 후생가면 시집살이는 안 할라네.

④ 문어야 대전복 손에 들고 친구 집으로 놀러 가세.
친구야 벗님은 간 곳 없고 손님떼만 모여든다.

⑤ 능청능청 저 비 끝에 시누 올케 마주 앉아.
나두야 죽어 후생가면 낭군 먼저 섬길라네.
(후략)

상주모심기소리 (국악정보, 2010. 7., 국립국악원)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534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www.youtube.com/watch?v=4wXH2ngoBKY 

 

연밥따는 노래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줄게
이내 품에 잠자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가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큰아가
연밥 줄밥 내 따줌세
백 년 언약 맺어다오
백 년 언약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간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418

 

https://kydong77.tistory.com/18534

 

상주 함창 공갈못에/ 상주아리랑, 명주 길쌈

공갈못 소재지: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 https://www.youtube.com/watch?v=-DgErZN4_0Y https://kydong77.tistory.com/manage/newpost/18534?type=post&returnURL=https%3A%2F%2Fkydong77.tistory.com%2Fmanage%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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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의 '경상'는 경주와 상주의 첫음절을 취한 말로 신라 9주의 하나였다. 너른 들판이 있어 고검면 양정리에 민요의 '공갈못'(공검못)을 만들었다. 현재는 상류 지역에 새로운 저수지를 조성했다.

◆공갈못=상주시 공검면 양정리에 있다. 제천의 의림지, 김제의 벽골지, 밀양 수산지와 더불어 삼한시대 4대 저수지의 하나로 꼽힌다. 한때 못의 둘레가 8㎞가 넘어 볶은 콩 한 되를 먹으면서 돌아도 콩이 모자랄 정도였다고 한다. 연꽃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공갈못 구경을 못하면 저승에 가서도 돌려보낸다는 전설이 있다. 1964년 정부가 쌀 증산을 위해 못을 주민에게 분양, 농지로 바꾸면서 면적이 크게 줄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GIVt0iGT90 

 

 

http://www.kbsm.net/news/view.php?idx=331719 

 

전통방식의 명주 생산하는 삼백의 고장, 오랜 역사 자랑하는 공검지 축조·전설… 고녕가야국 수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곳이 선정되어 국내외로 널리 알려지면서 도로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많아지고 있는 가운데 상주가 품고 있는 아름다운 길을 소개하고자 5곳을 선정해 이야기

www.kbsm.net

함창읍은 본래 고녕가야국(古寧伽倻國)인데 신라에서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을 만들었고, 경덕왕이 고령군(古寧郡)으로 고쳐서 가선현(嘉善縣)과 관산현(冠山縣)을 관장하였다. 
고려 광종(光宗) 15년(964) 갑자에 함녕군(咸寧郡)이 되었다가 현종 9년(1018) 함창군(咸昌郡)으로 고쳤으며 조선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1413)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고 세종지리지에 전해지고 있다.
 

함창읍은 본래 고녕가야국(古寧伽倻國)인데 신라에서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을 만들었고, 경덕왕이 고령군(古寧郡)으로 고쳐서 가선현(嘉善縣)과 관산현(冠山縣)을 관장하였다.

 
고려 광종(光宗) 15년(964) 갑자에 함녕군(咸寧郡)이 되었다가 현종 9년(1018) 함창군(咸昌郡)으로 고쳤으며 조선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1413)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고 세종지리지에 전해지고 있다.
 
 
* 한국사는 한 왕조의 건국이 오백년의 당위성을 지니는데, 함창이란 지명은 천년이나 되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군요. 상주를 삼백(三白- 상주의 특산물인 쌀, 명주, 곶감)의 고장이라 선전하는데 실상 삼백의 생산지는 함창입니다. 상주군을 대표하는 고장이라 하겠습니다.

 

[참고]

'공갈못'노래의 유래

AD 600 년 경에 만들었다는

상주시 공검면 소재 공갈못 - 지금은 공검면 양정리에 옛터가 남아 있고,

여기서 4 km 서쪽 상류에 '오태池'1955 년 경에 크게 만들어져 있다.

이 '오태池'가 이지대, 공검면, 사벌면, 외서면, 상주시 쪽의 논물 공급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Opb9SddRak 

 

 

상주의 대표 관광지

https://kydong77.tistory.com/20926

 

상주 경천섬 낙강교(洛江橋)와 범월교/ 이규보, 洛江泛舟&<東明王篇>

https://www.youtube.com/watch?v=fzQhM7NHbyA 이규보[李奎報, 1168년(의종 22) ~1241년(고종 28)] 同朴侍御將向梁州舟黃山江口占 ㅡ 박 시어와 함께 양주로 떠나려 하면서 황산강에 배를 띄우고 입으로 부르다..

kydong77.tistory.com

 

https://www.youtube.com/watch?v=0IbCq_Vzxto 

 

 

 

 

https://www.youtube.com/watch?v=45fCvCnN5FI 

 

 

 

https://www.youtube.com/watch?v=t3s7hf2BBa4&list=RDt3s7hf2BBa4&start_radio=1 

 

 

https://www.youtube.com/watch?v=m8TrrwRYqLw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535

 

김소월(金素月)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관은 공주(公州).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김성도(金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

encykorea.aks.ac.kr

1923년 일본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曺晩植)을 교장으로 서춘(徐椿)·이돈화(李敦化)·김억(金億)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羅稻香)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야(夜)의 우적(雨滴)」·「오과(午過)의 읍(泣)」·「그리워」·「춘강(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첫치마」·「엄마야 누나야」·「진달래꽃」·「개여울」·「제비」·「강촌(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삭주구성(朔州龜城)」·「가는 길」·「산(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新天地)』의 「왕십리(往十里)」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꽃촉(燭)불 켜는 밤」(1925)·「무신(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문명(文明)』에 「지연(紙鳶)」(1925)을 발표하고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첫치마」·「금잔디」·「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먼후일」·「꽃촉불 켜는 밤」·「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 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건강(健康)한 잠」(1934)·「상쾌(爽快)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팔벼개 노래」(1927)·「돈타령」(1934)·「삼수갑산(三水甲山)·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삼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소월(金素月))]

 

https://blog.daum.net/ulsanedu/7430225

 

김소월의 시, 초혼에 얽힌사연

김소월의 시, 초혼에 얽힌사연 초혼이 뭔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이 아닌가? 김소월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처절한 슬픔이 담겨진 사연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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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났다.
김정식이 3살 때 아버지는 일본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정식은 할아버지 집에서 아픈 상처를 가진 채 성장했다.
이후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3살 많은 누나 오순을 알게 된다.
정식은 종종 오순과 마을 폭포수에서 따로 만나며 마음을 의지했다.

정식이 14살이 될 때 까지 둘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일제강점기 하에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며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정식에게 행복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가 14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강제로 혼인을 올리도록 명령한 것이다.
혼인의 상대는 할아버지 친구의 손녀 홍단실이었다.
당시엔 집안 어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였고,

정식은 말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홍단실과 결혼한다.

세월이 흘러 오순이 19살이 됐을 때 다른 사람과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 둘의 연락은 끊겼지만 자신의 아픔을 보듬어주던 오순을 잊지 못한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이후에 일어난다. 
3년 뒤에 오순이 남편에게 맞아 사망한 것이다.
오순의 남편은 의처증이 심했고 폭력을 일삼았다.
정식은 아픈 마음을 안고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때 사랑했던 오순을 기리며 적은 시가 초혼(招魂)이다.
 

초혼

ㅡ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가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https://m.blog.naver.com/sub28/221701938235

 

#김소월(素月)의 삶과 시

소월 김정식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났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193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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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ㅡ 김소월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추거운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낯모를 딴 세상의 네길거리에
애달피 날 저무는 갓 스물이요
캄캄한 어두운 밤 들에 헤매도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비오는 모래밭에 오는 눈물의
추거운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https://www.youtube.com/watch?v=Uy4G-dN0j5w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ㅡ 김소월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당신이 하도 못 잊게 그리워서
그리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잊히지도 않는 그 사람은
아주나 내버린 것이 아닌데도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가뜩이나 설운 맘이
떠나지 못할 운(運)에 떠난 것도 같아서
생각하면 눈물이 쉬르르 흘러납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6%8C%EC%9B%94

 

김소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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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훗날 평안북도 곽산군에서 성장하였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군과 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컸다. 김소월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영향을 끼친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평안북도 곽산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 구성군 평지면의 홍시옥의 딸 홍단실과 결혼했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면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척들한테도 천시를 받았고 일본의 압박으로 부인과 동반자살 기도까지 했다.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2] 향년 33세였다.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면서 쓴웃음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소월이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먹곤 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인해 아편 과다복용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서울 남산 시비

 

    가족 관계

  • 아버지: 김성도
  • 어머니: 장경숙
  • 작은어머니(숙모): 계희영
  • 부인: 홍단실(풍산 홍씨) - 홍시옥의 딸
    • [추가]홍단실은 <임꺽정>을 지은 벽초 홍명희의 손녀. 벽초의 아들 홍기문은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한 사람이자 북한 향가 연구의 대가인 유명 국학자.
    • 첫째 딸: 김구생[10]
    • 둘째 딸: 김구원[10]
    • 첫째 아들: 김준호[10]
    • 둘째 아들: 김은호[10]
    • 셋째 아들: 김정호 - 1953년 반공포로로 석방, 김소월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남한에 거주하였다.
      • 손녀: 김은숙
      • 손자: 김영돈
    • 넷째 아들: 김낙호[10]

 

[참고]

부인: 홍단실(풍산 홍씨) - 홍시옥의 딸 - 벽초 홍명희의 손녀

벽초 홍명희

https://namu.wiki/w/%ED%99%8D%EB%AA%85%ED%9D%AC

일제강점기의 소설가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이다. 호는 벽초(碧初)[2]이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로 알려진[3] 인물로 실제로 셋은 죽마고우였으며 홍명희는 이 중 유일하게 친일로 변절하지 않았지만, 월북하여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언급하기를 꺼렸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4]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6.25전쟁 당시 이광수가 납북되자 신변을 보호해주었으며 이광수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 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출생으로 할아버지 홍승목은 일본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5]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한일병합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에 있는 대성중학교를 다니다가 한일병합이라는 비보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1919년 고향에서 3.1 운동에 참가하였고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보고 왔다.[6] 1927년 신간회 창설에 참가하여 부회장 직을 맡는 등 굵직한 항일 운동들을 전개해 나간다. 이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데 소설 <임꺽정>이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 홍명희는 한국인 최초로 에스페란토를 배운 사람이다. 벽초(碧初)란 호 자체가 '최초의 청록인', 즉 최초의 에스페란티스토를 의미하는 거라고 한다.
  • 그의 아들 홍기문은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한 사람이자 북한 향가 연구의 대가인[11]유명 국학자

 

https://kydong77.tistory.com/18251

 

김소월의 시세계

*[운영자 생각]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통해 일제에게 말살당한 민족혼을 일깨우고 주권회복의 염원을 토로한 작품으로 해석함이 맞을 것 같네요. 술에 취해 아편 복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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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김소월

나는 꿈 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가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갈. 나는 나아가리라
한걸음 한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새벽 동무들 저 혼자 -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개벽>, 1923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251 

 

 

 

https://www.youtube.com/watch?v=eWdDSpaZmhU 

 

 

https://www.youtube.com/watch?v=KhLexw_eGTk 

 

[왕십리 역전광장]

 

 

https://www.youtube.com/watch?v=SMvQxm2NgSA 

 

 

https://www.youtube.com/watch?v=iRfmRbjd_jA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https://www.youtube.com/watch?v=3OLeu-tQyjY 

 

 

 

 

 

 

 

 

 

행복
천상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 (청산, 1993)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skywind2018&logNo=221394448283 

 

시인 천상병 귀천과 새

그날은-새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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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출처- [새] 조광출판사(1971)

 

그날은

ㅡ 천상병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 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67년에 어이없게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정도 옥고를 치른 그는
죽을 때까지 다른 직업 없이 오직 시인으로 살아간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2%9C%EC%83%81%EB%B3%91

 

천상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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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千祥炳, 1930년 1월 29일 ~ 1993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시인, 문학평론가이다. 호는 심온(深溫), 본관은 영양(潁陽)이다. 일본 효고현(兵庫縣) 히메지(姬路)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일본 효고 현 고베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의 원적지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소풍 온 속세를 떠나 하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을 담은 시 《귀천(歸天)》으로 유명하다. 1967년 불행히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와 고문을 겪었으며, 1993년 지병인 간경화로 인해 타계하였다.

작품 목록

  • <덕수궁의 오후>
  • <어둔 밤에>
  • 《새》
  • <장마>
  • <간 봄>
  • <귀천>
  • 《주막에서》
  •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소릉조(小陵調)
-70년 추석에

 천상병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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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간첩단 조작사건] 1967년 7월 14일 자 신문을 펴든 문학인들은 1면 톱기사로 실린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동백림 사건)’의 전모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이 실린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어리둥절한 채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뜻밖에도 시인 천상병(千祥炳, 1930.1.29~1993.4.28)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1963년 10월 상순 일자 미상일 19시경 서울 명동 2가 유네스코 뒷골목 소재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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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17540

 

천상병 묘비명,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천상병의 묘비명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1) 시인은 유신체제가 만들어낸 '동백림간첩단사건'에 연루되면서 시대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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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았습니다.

 

https://kydong77.tistory.com/10345

 

천상병 산길/ 수락산

수락산전철역에 하차하여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와 올라가는 수락산 등산로 입구에는 <천상병산길>이 조성되어 있고, 그의 서체로 판각한 그의 시 몇 편을 배치하였다. 수락산 깔딱고개 산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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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17536

 

천상병 공원

서울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입구에 있는 천상병 공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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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번 포스트를 보다가 귀천하신 천상병님을 환기하여

영면하신 어머님과 누님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뿐만 아니라 "어머님과 누님들은 아름다웠다."고 외쳐 봅니다.

이 블로그 글 가운데 반복 게재도 있지만 천상병님이 16꼭지나 있는 걸 보면 나는 그분을 무척이나 존경하나 봅니다.

그 가운데 수락산길에서 만난 시판들을 다시 읽어 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pCrwHwt010 

 

 

https://www.youtube.com/watch?v=vCOvlpfO9CU 

 

 

*위의 한국어 번역은 오역임.

 

https://blizen.tistory.com/95

 

우물쭈물하다 이렇게 오역한다 - 버나드 쇼 묘비명 오역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오역하다니! - 버나드 쇼 묘비명 오역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보기좋게 오역이다. 대체 어디서 이런 오역이 나왔는지, 그리고 제대로 번역하면 무엇이 되는지 살펴보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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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다보면 내 이런 일(죽음)이 생길 줄 알았지."

"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https://m.cafe.daum.net/readandchange/auS1/4491?listURI=%2Freadandchange%2FauS1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 영어 - 발효 인문학, 읽나바

I know I suck! but let me just talk to you for a sec여기저기서 많이 인용되는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주지하다시피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쓰여진 것으로 원문은 " "I knew if I stayed 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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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인용되는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주지하다시피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쓰여진 것으로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다.

그렇다면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맞는 번역인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니고 더 정확한 번역은

"오래 살다보면 내 이런 일(죽음)이 생길 줄 알았지."가 된다.

 

[참고]

https://kydong77.tistory.com/17855

 

 

 

김종필 전 총리의 自撰 묘비명

김종필 전 총리의 自撰 묘비명이 화제다. 이를 옮겨 본다. http://www.kukinews.com/news/article.html?no=560535 다음은 김 전 총리가 작성했던 묘비명 전문. 「思無邪」를 人生의 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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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총리의 自撰 묘비명이 화제다. 이를 옮겨 본다. 

http://www.kukinews.com/news/article.html?no=560535

 

김종필 전 총리 묘비명 121자에 드러난 애뜻한 ‘아내 사랑’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고 박영옥 여사에 대한 애뜻한 감정을 표시한 묘비명이 알려져 세간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25일 정치권에 따르면 김

www.kukinews.com

 

다음은 김 전 총리가 작성했던 묘비명 전문. 

「思無邪」를 人生의 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을 治國의 根本으로 삼아 

國利民福과 國泰民安을 具現하기 위하여 獻身盡力 하였거늘 

晩年에 이르러 「年九十而知 八十九非」라고 嘆하며 

數多한 물음에는 「笑而不答」하던 者- 

內助의 德을 베풀어준 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銘 雲庭 自僎 

書 靑菴 高崗 

 

[풀이 ]

“한 점 허물없는 생각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나라 다스림 그 마음의 뿌리를 ‘무항산이며 무항심’에 박고 몸 바쳤거늘,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숨 짓는데,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 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7855 

 

https://www.youtube.com/watch?v=-yzAcONK7WY 

 

 

https://www.youtube.com/watch?v=_xdyRTmEpZk 

 

 

 

 

https://www.youtube.com/watch?v=qXFcPV1CEzc 

 

 

메기의 추억

ㅡ 김창범

 

내 기억 속으로 노래가 들린다. 

아이리시 가수 앤 브린이 부르던 그 노래가 

아직도 흐른다. 아련히 펼쳐진 기억의 시내를 뒤집고 

애잔하던 그대 모습이 앳된 목소리를 타고 다가온다.

그때는 우리가 아직 젊었을 때, 나는 그대만을 사랑하고 

그대는 나만을 사랑한다며 나누던 첫 고백의 노래가 흐른다.

방금 나온 드립 커피처럼 내 인생의 뜨건 숨소리가 들려온다.

아코디언 소리는 가물거리지만, 여전히 추억이 넘치는 곳,

옛날에 금잔디, 장미꽃 동산에 시냇물 잔잔히 흐르던 곳,

그리운 목소리는 물레방아 소리처럼 쉬지 않고 속삭이고

내 가슴은 옛적 그 사랑으로 여전히 뛰어오르지 않았던가? 

숲속의 새들처럼, 반짝이는 물고기처럼 싱싱하게 날아오르던 날들,

차마 녹 쓸어 잊혀갈까, 세월의 먼지가 되어 사그라질까,

메기의 추억을 그 옛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부른다. 

내 깊은 가슴 유치한 액자 속에 그대는 아직도 

애타는 그리움으로 걸려있구나. 

내 사랑하는 메기야.

 

(월간시, 2020년 9월호)

 

 

https://blog.naver.com/lifehand77/222792160736

 

노래 <메기의 추억>을 추억하며

우리나라의 장년층 이상이 즐겨 부르는 노래로 <메기의 추억>이 있다. 이 노래는 테너가수 박인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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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imoon25&logNo=221611039954 

 

미국 민요 "매기의 추억"

미국 민요 "매기의 추억" 노래 : 매기의 추억(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작시: 조지 존슨(Ge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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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의 추억

★원명 :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우리말 번안가사 : 윤치호)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메기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메기야 희미한 옛생각
동산 수풀은 없어지고 장미화는 피어 만발하였다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메기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메기야 희미한 옛생각
동산 수풀은 없어지고 장미화는 피어 만발하였다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


★원가사:George Johnson '단풍잎'의 詩로 (부인 Maggie Clark의 추억을 그린 것)
작곡:1866년 James Butterfield , 미국민요

윤치호의 번안 가사도 탁월하지만,

조지 존슨(George Johnson,1839~1917,캐나다)의 原詩를 음미하며 감상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U_cHVE35nVI 

 

 

https://www.youtube.com/watch?v=EQcnIT4wITo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rsg861&logNo=80199136212 

 

407.'매기의 추억'(원명,When You and I Were Young,Maggie:당신과 내가 젊었을 때,매기야) 1)노래의 배경 2)

1) 노래의 배경(출처:Wikipedia)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is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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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당신과 내가 젊었을 때, 매기야)  

 

Music by James Butterfield(제임스 바터필드 작곡)
Lyrics by George Johnson(조지 존슨 작사)

I wandered today to the hill, Maggie 나는 오늘 그 언덕으로 배회했다,매기야
To watch the scene below 아래의 경치를 보기 위하여
The creek and the rusty old mill, Maggie 그 시내와 녹슬고 오랜 방아간,매기야
Where we sat in the long, long ago. 오래 오래 전에 우리가 앉아 있었던.
The green grove is gone from the hill, Maggie 푸른 숲은 언덕에서 사라졌다,매기야
Where first the daisies sprung 먼저 데이지(국화)가 돋아나던 
The old rusty mill is still, Maggie 그 오래되고 녹슨 방아간은 아직고 있다,매기야
Since you and I were young. 당신과 내가 젊었을 때 이후로

※Refrain:후렴

<And now we are aged and grey, Maggie>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늙고 백발이다, 메기야!>
<The trials of life nearly done> <인생의 시련이 거의 지나갔으니>
<Let us sing of the days that are gone, Maggie> <흘러간 세월을 함께 노래하자,매기야>
<When you and I were young.> <당신과 내가 젊었을 때>

 

A city so silent and lone, Maggie 그렇게나 고요하고 외로운 도시구나,매기야
Where the young and the gay and the best 젊고 쾌활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In polished white mansion of stone, Maggie 빛이나는 흰 석조로,매기야
Have each found a place of rest 각자가 안식처를 세웠던 (곳)
Is built where the birds used to play, Maggie 새들이 놀던 곳에 지었다,매기야
And join in the songs that were sung 그리고 (새들이) 함께 노래하던 (곳에)
For we sang just as gay as they, Maggie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들만큼 쾌활하게 노래했다,
When you and I were young. 당신과 내가 젊었을 때

※Refrain:후렴

<And now we are aged and grey, Maggie>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늙고 백발이다, 매기야!>
<The trials of life nearly done> <인생의 시련이 거의 지나갔으니>
<Let us sing of the days that are gone, Maggie> <흘러간 세월을 함께 노래하자,매기야>
<When you and I were young.> <당신과 내가 젊었을 때>

 

They say I am feeble with age, Maggie 사람들은 내가 늙어서 약하다고 말한다,매기야
My steps are less sprightly than then 나의 발걸음은 그때보다 활기가 없어졌다고
My face is a well written page, Maggie 나의 얼굴은 잘 쓰여진 페이지이고,매기야
But time alone was the pen. 그러나 세월만이 펜이였다.
They say we are aged and grey, Maggie 사람들은 우리가 늙었고 백발이라고 말한다,매기야
As spray by the white breakers flung 마치 스프레이로 흰 물결을 뿌린 것처럼
But to me you're as fair as you were, Maggie 그러나 나에게는 당신은 그때만큼 아름답구나'매기야
When you and I were young. 당신과 내가 젊었을 때

※Refrain:후렴

<And now we are aged and grey, Maggie>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늙고 백발이다, 매기야!>
<The trials of life nearly done> <인생의 시련이 거의 지나갔으니>
<Let us sing of the days that are gone, Maggie> <흘러간 세월을 함께 노래하자,매기야>
<When you and I were young.> <당신과 내가 젊었을 때>

 

'당신과 내가 젊었을 때,매기야'는 유명한 민요,팝송,그리고 표준적이다. 비록 테네시, 스프링턴이 그의 매기를 위하여 1820년에 그 고장의 조지 존슨에 의하여 이 노래가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오래된 방아간 밖에 조그만한 기념비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이러하다.

그 노래의 가사는 온타리오 주, 해밀톤 출신의 캐나다 학교 선생인 조지 워싱턴 존슨이 쓴 시이다. 매기 클라크는 그의 학생이었다. 그들은 사랑에 빠졌고, (매기)가 병이 든 때 나이가라 언덕 끝으로 올라가서 지금의 해밀톤 중심가를 내려다 보면서 그 시를 작성했다. 일반적인 어조는 단지 감상적이거나 늙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애수와 위로일 것이다.

그것은 '단풍 잎'(Maple Leaves)이라는 그의 시집에 1864년에 출판되었다.

그들은 1864년에 결혼했으나 매기의 건강이 악화되어 1865년 5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제임스 오스틴 바터필드(James Austin Butterfield)가 그 시를 작곡했고 그리고 그 음악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조지 워싱턴 존슨1917년에 사망했다.( 참고. 매기  1865년 5월 12일 사망)

두 애인이 만났던 학교 건물이 해밀턴 언덕 위에 아직도 서 있고, 그리고 그 노래의 이름을 가진 한 기념 동판이 그 낡은 건물 앞에 서 있다. 2005년에 조지 워싱턴 존슨은 '캐나다 노래작사자 명사의 홀'(Canadian Songwriters Hall of Fame)에 들어 왔다

 

https://kornan.tistory.com/110

 

앤브린 - 메기의 추억

Ann Breen -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이 노래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철학교수이자 시인인 조지 존슨(1839~1917)과 그의 아내 메기 클라크의 실화를 노래한 곡이라네요. 그는 제자인 메기 클라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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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pebkREff1oo 

 

https://blog.daum.net/ijuhui/6106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메기의 추억) / Ann Breen

애잔하게 스며드는 메기의 추억(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은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철학교수이며 시인인 조지 존슨(1839~1917)과 그의 사랑하는 아내 메기 클라크의 실화를 노래한 곡이다. 교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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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잔하게 스며드는 메기의 추억(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철학교수이며 시인인

조지 존슨(1839~1917)과 그의 사랑하는 아내 메기 클라크의 실화를 노래한 곡이다. 

교사시절, 그는 제자인 메기 클라크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들은 메기의 집근처 개울가에서 자주 데이트를 즐겼고, 조지 존슨은 메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즐겨 시로 표현했다.

두 사람은 1865년 결혼,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로 이주하여 신접살림을 차리고 조지 존슨은 그곳 학교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둘의 꿈같은 결혼생활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불행히도 사랑하는 아내 메기가 결혼한 지 1년도 못되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메기와의 추억이 서려있는 클리블랜드를 떠나 캐나다 토론토로 돌아온다.

사랑하는 아내 메기를 추억하며 그에 대한 그리움과 애상을 시로 표현했는데

거기에 친구인 James Austin Butterfield을 붙여 탄생한 곡이 바로 이 '메기의 추억'이다.

 

  "추억 어린 경치를 바라보려고 오늘 나는 이 언덕에 올랐다, 메기.

  개울과 낡은 물레방아 먼 옛날 우리 둘이 얘기를 나누던 그 곳에

  가장 먼저 핀 대지 향 풍겨온 그곳에 푸르른 나무는 언덕에서 사라졌지만

  개울의 흐름과 물레방아도 그대와 내가 젊었을 때 그대로구나"

 

https://www.youtube.com/watch?v=TdNlbQCciNg 

 

 

https://blog.naver.com/lifehand77/222783976369

 

수지문학에 김창범 시인의 근작시 3편을 실었습니다.

수지문학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지역에 거주하는 시인들을 중심으로 시, 평론, 수필, 짧은 소설 등을 게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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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시 3편

*세상을 혜엄쳐 건너는 법

*누군가의 박스를 열었을 때

*냇가를 걷노라면 눈물이 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zuG6Vlc0HQ 

 

 

인용시가 탑재된 김창범 시인의 블로그는 아래 포스트와 같습니다.

https://blog.naver.com/lifehand77

 

김창범 시인의 <길을 걷는 詩 > : 네이버 블로그

길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 길이 내 인생의 목적지이고 마지막 도착지입니다. 인생의 성공을 만들어가는 기쁨과 여유가 넘치는 곳은 주님께서 내 앞에 펼쳐놓

blog.naver.com

 

https://blog.naver.com/lifehand77/222758213555

 

故 김지하 시인에 관한 여섯 가지 에피소드

흔히 지상에서 주어진 생애를 다 마치고 떠난 사람에 대해 ‘별이 졌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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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kydong77.tistory.com/18916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박경리. 박완서

박경리(朴景利 )의 가족 관계[편집] 남편 김행도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에 좌익으로 몰려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으며, 그와의 사이에 외동딸 김영주를 두었다. 김영주는 1973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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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aX8_auHMaiA 

 

https://kydong77.tistory.com/21410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저항 시인 김지하 별세…향년 8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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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UyR-L1w6w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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