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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47)하서(夏書)(17)오자지가편(五子之歌篇)(2) 첫째가 노래하여 한탄하였다.

             <서경(書經)>(47) 하서(夏書)(17)         하(夏)는 우(禹)를 비롯한 그의 자손들이 중국을 다스렸던 왕조를 가리킨다. 하서(夏書)는 하 왕조(夏王   朝)의 사관(史官)이 기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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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첫째가 노래하여 한탄하였다.

  

   其一曰(기일왈)

   이들 중의 첫째가 노래하였다.

   皇祖有訓(황조유훈)

   "임금인 조부께서 훈계를 내리셨도다.

   民可近(민가근) 不可下(불가하)

   ‘백성들을 가까이 해도 괜찮지만, 얕잡아 보면 안 된다’고.

   民惟邦本(민유방본)

   백성들이야 말로 나라의 근본이니,

   本固邦寧(본고방녕)

   근본이 튼튼해야 진실로 나라가 편안케 되리라.

   予視天下(여시천하) 愚夫愚婦(우부우부)

   내가 천하를 둘러 보니, 우둔한 남자와 우둔한 여자가,

   一能勝予(일능승여)

   나보다도 낫더라.

   一人三失(일인삼실) 怨豈在明(원기재명)

   한 사람이 세 번 실수는 할 수 있는데, 어찌 겉으로 밝혀지랴.

   不見是圖(불견시도)

   원망은 보이지 않을 때 도모해야 하는 것이거늘,

   予臨兆民(여림조민)

   너는 억조창생을 대함에 있어서,

   懍乎若朽索之馭六馬(늠호약후삭지노륙마)

   두려워 하기를 썩을 고삐로 여섯 필의 말을 몰듯 하였나니,

   爲人上者(위인상자) 柰何不敬(내하불경)

   남의 윗사람이 되어,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으랴!"     

 

    * 태강의 다섯 동생은 차례로 그들의 조부인, 우(禹)의 교훈을 들어서 노래를 부르는데,

이 절에서는 이들 가운데 첫째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부른 노래이다.

그는 백성들이 나라의 근본인데도 백성들을 저버리고 놀이에만 탐닉하는 형이,

임금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을 잃은 것에 대하여 한탄을 한 것이다.

태강의 다섯 형제가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하는 것은, 우왕의 교훈에 곡을 붙여서 읊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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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46)하서(夏書)(16)오자지가편(五子之歌篇)(1) 태강(太康)의 형제들이 노래지어 한탄하다

             <서경(書經)>(46) 하서(夏書)(16)         하(夏)는 우(禹)를 비롯한 그의 자손들이 중국을 다스렸던 왕조를 가리킨다. 하서(夏書)는 하 왕조(夏王   朝)의 사관(史官)이 기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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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오자지가(五子之歌)(1)

   이 편은 <위고문상서>에만 실려있는 내용이다. 한초(漢初)에 발표된 <금문상서>에는 없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의 위작(僞作)이 아닌가 의심 스럽지만, 내용에 있어서 퍽이나 교훈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읽어

   볼 만한 대목이다. 오자(五子)는 계왕(啓王)의 다섯 아들인데, 이들이 형(兄)을 원망하여 노래한 것 이므

   로, 오자지가(五子之歌)라는 이름을 붙였다. 본래 계왕(啓王)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으며, 큰아들 태강

   (太康)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태강은 정사에 힘쓰지 않고 사냥등 놀이에만 급급하다가 결국 왕위

   에서 쫓겨 나고 말았다. 이에 오자 곧 태강의 다섯 동생들이 형의 실정(失政)을 한탄하여 이 노래를 지어

   서 불렀다고 한다.    

 

[1] 태강(太康)의 형제들이 노래지어 한탄하다  

 

   太康失邦(태강실방) 昆弟五人(곤제오인)

   태강이 나라를 잃게 되자, 형제들 5명은,

   須于洛汭(수우락예) 作五子之歌(작오자지가)

   낙수(洛水)에서 이를 한탄하여, 오자지가를 지어 노래하였다.

   太康尸位以逸豫(태강시위이일예)

   태강(太康)은 할 일 없이 헛되이 왕위에 올랐을 뿐,

   滅厥德(멸궐덕)

   놀이로 그 덕을 멸하였도다.

   黎民咸貳(여민감이)

   백성들이 모두 두 마음을 지녔거늘,

   乃盤遊無度(내반유무도)

   절도없이 싸다니며 놀이에만 급급하여라.

   畋于有洛之表(전우유락지표)

   낙수(洛水)의 남쪽으로 사냥을 떠나더니,

   十旬弗反(십순불반)

   100일이 지나도록 돌아올 줄 모르더라.

   有窮后羿(유궁후예) 因民弗忍(인민불인)

   유궁씨(有窮氏)의 후예(后羿)가, 백성들이 견디지 못한다는 이유로,

   距于河(거우하)

   황하에서 그를 막았도다.

   厥弟五人(궐제오인) 御其母以從(어구모이종)

   그의 아우 다섯은, 그들의 어머니를 모시고 따라 갔다가,

   徯于洛之汭(혜우락지예)

   낙수의 물굽이에서 기다렸노라.

   五子咸怨(오자감원)

   오자(五子)가 모두 원통함을 느끼고,

   述大禹之戒以作歌(술대우지계이작가)

   대우(大禹)의 훈계를 서술하여 노래를 지었도다.     

 

    *계(啓)가 재위 9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태강(太康)이 왕위에 올라 우(禹)와 계(啓) 2대에

     걸친 유업(遺業)을 이어받게 되었는데, 제후들은 이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강은

     불행 하게도 정사에는 전념하지 않고, 놀이에만 급급한 까닭에 덕을 잃고 민심은 그를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태강은 여전히 반성할줄 모르고 사냥을 다니며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하였다. 그때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활현(滑縣)의 조(鉏)라는 곳에 유궁(有窮)이라는 나라의 제후인 예(羿)가 있었

     다. 그의 선조인 세(世)는 사관(射官)이라는 벼슬을 하던 사람으로서, 조(鉏)땅에 봉해져, 세(世)의 후

     손들이 순임금과 하조(夏朝)의 2대 군주인 계(啓)를 모시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태강이 즉위하여 정사

     를 돌보지않자, 짐심(斟鄩)땅으로 옮겨 무력으로 태강을 위혐하고 핍박하여 정권을 빼앗아 버렸다. 그

     리하여 태강은 명색뿐인 왕이 된 것이다. 이 오자지가는 바로 이 때의 일이다. 예(羿)는 전설적으로 유

     명한 인물이다.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 하늘에 열개의 해가 생겨 났는데, 타오르는 태양열에 농

     사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이 더위에 지쳐 죽을 지경이었다. 이에 요임금은 중신을 불러 의논한 결과

     활을 쏘아서 아홉 개의 해를 떨어 뜨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전국의 명궁(名弓)들을 찾은 결과, 뽑힌 사

     람이 바로 예(羿)였다. 예는 명실공히 천하의 명궁이면서 장사였다. 보통사람이면 당기지도 못하는 활

     을 들고 나와서, 요임금의 눈앞에서 아홉 개의 해를 쏘아 떨어 뜨렸다. 때문에 사람들은 예(羿)를 요임

     금 치세의 사람으로 알고들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전설이며,실은 하왕조(夏王朝) 사람으로 결국 왕위까

     지 찬탈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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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45)하서(夏書)(15)감서편(甘誓篇)(1) 계(啓)가 유호씨를 경계하여 <감서(甘誓)>를 짓다.

             <서경(書經)>(45) 하서(夏書)(15)         하(夏)는 우(禹)를 비롯한 그의 자손들이 중국을 다스렸던 왕조를 가리킨다. 하서(夏書)는 하 왕조(夏王   朝)의 사관(史官)이 기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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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감서(甘誓)(1)

   감(甘)이란 땅의 이름이고, 서(誓)는 싸움에 임하여 왕이나 제후등의 지휘관이 장졸을 모아놓고 하는 훈

   시(訓示)를 말한다. 이 편은 <금문상서>및 <고문상서>에 모두 수록이 되어 있는데, 우(禹)의 뒤를 이어

   서 왕이된 계(啓)가 싸움의 취지를 밝히고 군령(軍令)을 전달하는 동시에 장졸들을 격려한 훈시이다. 우

   (禹)의 아들 계(啓)가 왕위에 오른후 다른 제후들은 모두 계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유독 유호씨(有扈氏)

   만이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啓)는 친히 유호씨를 정벌하기에 이르렀는데, 감(甘)이라는 곳에서 이

   <감서(甘誓)>를지어 휘하의 장졸들을 격려한 것이다.그래서 유호씨를 멸하고 모든 제후들의 지지를 얻

   어 대국(大國)을 안정시켰으며, 뿐만 아니라, 그로써 왕위가 자식에게 전해지는 부자(父子) 세습제가 확

   립되었고, 하왕조의 기틀이 잡힌 것이다.     

 

[1] 계(啓)가 유호씨를 경계하여 <감서(甘誓)>를 짓다.  

 

   啓與有扈(계여유호) 戰于甘之野(전우감지야)

   계(啓)가 유호(有扈)와 더불어, 감(甘)의 들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作甘誓(작감서) 大戰于甘(대전우감) 乃召六卿(내소륙경)

   <감서(甘誓)>를 짓고, 감에서 전쟁중인, 육경들을 불러 놓고,

   王曰(왕왈) : 계왕(啓王)이 이렇게 말하였다.

   (차) 六事之人(육사지인)

   "오! 천자의 군대인 육군(六軍)의 사람들이여!

   予誓告汝(여서고여)

   내가 이제 훈시를 하여 그대들에게 이로노라.

   有扈氏威侮五行(유호씨멸모오행)

   유호씨(有扈氏)는 오행(五行)을 모멸하고,

   怠棄三正(태기삼정)

   삼정(三正)을 태만히 여겨 저버리니,

   天用勦絶其命(천용초절기명)

   하늘이 그의 명(命)을 끊으려 하고 있다.

   今予惟恭行天之罰(금여유공행천지벌)

   오늘 나는 삼가 하늘을 대신하여 그에게 벌을 내리고자 한다.

   左不攻于左(좌불공우좌)

   왼쪽의 군사들이 왼쪽의 적을 공격하지 않으면,

   汝不恭命(여불공명)

   그대들은 명(命)에 공손히 복종하지 않는 것이고,

   右不攻于右(우불공우우)

   오른쪽의 군사들이 오른 쪽의 적을 공격하지 않으면,

   汝不恭命(여불공명)

   그대들은 명(命)에 공손히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御非其馬之正(어비기마지정)

   또한 전차의 말(馬)을 올바로 몰지 않으면,

   汝不恭命(여불공명)

   이 역시 그대들은 명(命)에 공손히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用命賞于祖(용명상우조)

   명을 받들면 선조의 위패 앞에서 상을 주려니와,

   弗用命戮于社(불용명륙우사)

   명을 받들지 않으면 지신(社)의 위패 앞에서 죽이고,

   予則孥戮汝(여즉노륙여)

   그대들의 처자까지도 모두 죽일 것이니라!" 

   

    *이편을 계(啓)가 유호씨(有扈氏)와의 싸움에 앞서서 훈계한 것이라고도하고, 우(禹)가 유호씨와 싸울

     때의일이라고도 하며,<여씨춘추>의 선기편(先己篇)에서는 하왕(夏王)이 유호씨와 싸우기전에 감(甘)

     에서 한말이라고도 하였다. 계(啓)는 앞에서 적(敵)인 유호씨(有扈氏)의 죄상을 들어 공박하고 뒤에서

     는 부하 장졸들에게 군령(軍令)을 엄히 다스리도록 당부를 하고 있다. 이는 계가 우왕(禹王)의 뒤를 이

     어 왕위에 오른 후,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호현(扈縣) 북쪽의 제후로 있던, 유호씨가 계(啓)를 받들지

     않았으므로 친것이라고 하는데, 유호씨(有扈氏)는 하우씨(夏禹氏)와 같은성을 가진 제후라고도 하며,

     계(啓)의 서형(庶兄)이라는 설(說)도 있다. 어쨌든 우(禹)의 치수로 인망과 노력을 심었던 하왕조의 기

     틀은 이로써 굳건해 졌다고 볼수가 있겠다. 서경(書經)의 집전(集傳)에 의하면,"육경(六卿)은, 여섯 고

     을의 경(卿)으로, <주례(周禮)>의 지관사도(地官司徒)를 살펴 보건대 향대부는 고을마다 경 1인이니,

     여섯 고을에 여섯 경이라. 평소에 일이 없으면 각각 그 고을의 정교와 금령을 관장하여 대사도에게 속

     하고, 유사시에 출정하면 각각 그고을의 1만 2천 5백인을 거느려서 대사마에게 속하니, 이른바 군장이

     모두 경(卿)이라는 것이 이것이라. 아마도 하나라 제도도 이와 같을 것이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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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44)하서(夏書)(14)우공편(禹貢篇)(14) 우(禹)가 오복(五服)을 설정하였다.

             <서경(書經)>(44) 하서(夏書)(14)         하(夏)는 우(禹)를 비롯한 그의 자손들이 중국을 다스렸던 왕조를 가리킨다. 하서(夏書)는 하 왕조(夏王   朝)의 사관(史官)이 기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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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우(禹)가 오복(五服)을 설정하였다.  

 

   五百里甸服(오백리전복) 

   도읍지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 100리의 땅을 전복(甸服)이라 했다. 

   百里納總(백리납총) 

   100리의 안은 부세로 볏단을 바치게 하고,

   二百里納銍(이백리납질) 

   두번째의 100리 안은 이삭을 바치게 하였다.

   三百里納秸服(삼백리납갈복) 

   세번 째의 100리 안은 짚과 수염을 딴 낟알을 바치게 하였고,

   四百里粟(사백리속) 

   넷째의 100리 안은 찧지 않은 낟알만 바치게 하였으며,

   五百里米(오백리미) 

   다섯째 100리 안은 쌀을 바치게 하였다.

   五百里侯服(오백리후복) 

   전복 밖의 사방 5백리 땅은 후복(侯服)이라 하였다.

   百里采(백리채) 

   첫 100리 안의 땅은 경대부(卿大夫)들이 봉함을 받은 땅이고,

   二百里男邦(이백리남방) 

   두 번째 100리는 남작(男爵)들이 봉함을 받는 나라이며,

   三百里諸侯(삼백리제후) 

   나머지 3백리 안의 땅은 제후(諸侯)들이 다스리는 땅이다.

   五百里綏服(오백리수복) 

   후복 밖의 5백리를 수복(綏服)이라 하였다.

   三百里揆文敎(삼백리규문교) 

   첫 3백리 안의 땅은 교화를 원칙으로 삼았으며,

   二百里奮武衛(이백리분무위) 

   나머지 2백리 땅은 무위(武衛)을 떨쳐 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五百里要服(오백리요복) 

   수복 밖의 5백리를 요복(要服)이라 하였다.

   三百里夷(삼백리이) 

   첫 3백리 안의 땅은 이족(夷族)들이 살게 하였고,

   二百里蔡(이백리채) 

   나머지 2백리 땅은 가벼운 죄인을 귀양보내는 채(蔡)이다.

   五百里荒服(오백리황복) 

   요복 밖의 5백리를 황복(荒服)이라 핬다.

   三百里蠻(삼백리만) 

   첫 3백리 땅은 만족(蠻族)을 살게 하였고,

   二百里流(이백리류) 

   나머지 2백리 땅은 중죄인을 귀양보내는 유형지인 류(流)이다.

   東漸于海(동점우해) 西被于流沙(서피우류사)

   이리하여 동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서로는 유사(流沙)까지 닿았다.

   朔南曁(삭남기) 聲敎訖于四海(성교흘우사해) 

   북녘에서 부터, 남녘까지 명성과 교화가 온 세상에 퍼졌다.

   禹錫玄圭(우석현규) 

   우(禹)는 검은 구슬로 만든 홀인 현규(玄圭)를 바치고,

   告厥成功(고궐성공) 

   모든 일이 이루어 졌음을 아뢰었다.      

   

    *여기에서는 우(禹)가 치산치수(治山治水)와 행정적인 체계를 확립하는 정책으로 나라의땅을 오복(五

     服) 으로 나눈 업적을 서술하고 있다. 

본래 오복(五服)의 명칭과 순서는, 중국 요순(堯舜) 시대의 제도에서는,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를 매복(每服) 5백리씩 순차적으로 나눈 다섯 구역을 말하던 것인 데, 

     상고에는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을 오복 이라 하였으나,

대(周代)에는 후복(侯服)·전복(甸服)·남복(男服)·채복(采服)·위복(衛服)을 오복이라 칭하게 되었다.

로써 우(禹)의 업적을 치수(治水)와 부세(賦稅)의 행정구역을 중심으로하여 대략 살펴보았다.

물론 이 편에서 존 산이나 가으 혹은 호수가 오늘날의 어느곳을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은곳도 있으며,

우(禹)가 자신의 혼자 힘으로 중국이라는 방대한 지역을

이와 같은 대사업을 완수 했다고 하는 점은 조금 과장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의 시대부터 근대국가로 발전할수 있었으며,

민생의 안정과 행정 구역과 세제(稅制)의 확립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는 처음 정사를 맡게되자, 고요(皐陶)를 중용하였으나, 곧 고요가 죽게 되었으므로, 

다시 백익(伯益)을 등용하여 그를 돕도록 함으로써 중국을 잘 다스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만년에 이르러 우(禹)는 백익(伯益)에게 그의 자리를 계승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禹)의 공적이 너무나 위대했기 때문에

제후와 백성들은 모두 우(禹)의 은덕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한편 우(禹)의 아들인 계(啓) 역시 현명하였으므로,

제후들과 백성들이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이라고 한다. 

     우(禹)는 제위 8년 만에 죽었는데,

처음에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우현(禹縣)인 양적(陽翟)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다시 지금의 산서성(山西省)안읍현(安邑縣)부근인 안읍(安邑)으로 옮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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