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나라 사람 누군가가 자공(子貢)에게 말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닮았고, 그 목덜미는 요(陶)와 닮았고, 그 어깨는 자산(子産)과 닮았어요. 그러나 허리 이하는 우(禹)임금보다 3촌(寸)이 짧으며, 풀 죽은 모습은 마치 상가(喪家)의 개와 같았습니다.”
子貢以実告孔子.
자공은 이 말을 그대로 공자에게 고했다.
孔子欣然笑曰:「形状, 末也. 而謂似喪家之狗, 然哉! 然哉!」
공자는 흔쾌히 웃으며 말했다.
“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상가의 개’와 같다고 했다는데, 그것은 정말 그랬었지! 그랬었고 말구!”
孔子遂至陳, 主於司城貞子家.
공자는 드디어 진(陳)나라에 이르러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에 머물렀다.
歳余, 呉王夫差伐陳, 取三邑而去. 趙鞅伐朝歌.
1년 남짓 되었을 때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진(陳)나라를 쳐서 세 읍을 빼앗아 돌아갔다.
진(晉)나라의 조앙(趙鞅)은 조가(朝歌)를 공격했다.
楚囲蔡, 蔡遷于呉. 呉敗越王句践会稽.
초 나라는 채(蔡)나라를 포위했고, 채나라는 오나라의 땅으로 옮겨가서 오나라의 보호를 받았다. 오나라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회계(會稽)에서 패배시켰다.
有隼集于陳廷而死, 楛矢貫之, 石砮, 矢長尺有咫.114) 陳湣公使使問仲尼.115)
어느 날 매 한 마리가 진(陳)나라 궁정에 떨어져 죽었는데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이 몸에 꽂혀 있었고 그 화살촉은 돌로 되어 있었으며, 화살의 길이는 1척 8촌이었다. 진 민공(陳湣公)이 사자를 보내어서 공자에게 물었다.
仲尼曰:「隼來遠矣, 此粛慎之矢也.116)
공자가 말했다. “매는 멀리서 왔습니다. 이것은 숙신(肅愼)의 화살입니다.
昔武王克商, 通道九夷百蛮,117) 使各以其方賄來貢,118) 使無忘職業.
옛날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멸한 후에 여러 소수민족들과 교통하고 각각 그 지방의 특산물을 조공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직책과 의무를 잊지 않게 했습니다.
於是粛慎貢楛矢石砮, 長尺有咫. 先王欲昭其令徳, 以粛慎矢分大姫,119)
이에 숙신은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로 만든 화살촉을 바쳤는데 길이가 1척 8촌이었습니다. 선왕께서는 그의 미덕을 표창하고자 숙신의 화살을 큰딸 대희(大姬)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配虞胡公而封諸陳.
그 후 장녀를 우(虞)의 호공(胡公)과 결혼을 시키고, 우 호공을 진(陳)나라에 봉했지요.
分同姓以珍玉, 展親;120)
동성 제후들에게는 진귀한 옥을 나누어주어 친척의 도리를 다하게 했고,
分異姓以遠職, 使無忘服.121) 故分陳以粛慎矢.」
이성 제후들에게는 먼 지방에서 들어온 조공품을 나누어주어 무왕에게 복종할 것을 잊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진(陳)나라에게는 숙신의 화살을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試求之故府, 果得之.122)
진 민공이 시험 삼아 옛 창고에서 그 화살을 찾아보게 했는데 과연 그것이 있었다.
孔子居陳三歳, 会晉楚争彊, 更伐陳, 及呉侵陳, 陳常被冦.
공자가 진(陳)나라에 머문 지 3년, 때마침 진(晉)과 초(楚) 나라가 강함을 다투며 서로 차례로 진(陳)나라를 침범했고, 오나라가 진(陳)나라를 침범할 때까지, 진(陳)나라는 항상 침공을 당했다.
孔子曰:「帰與帰與! 吾党之小子狂簡, 進取不忘其初.」於是孔子去陳.
공자가 말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고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지만 단지 일을 함에는 소홀함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진취성이 있고, 그들은 초지를 잊지 않고 있다.” 이에 공자는 진(陳)나라를 떠났다.
過蒲, 会公叔氏以蒲畔, 蒲人止孔子.
포(蒲)를 지날 때, 때마침 공숙씨(公叔氏)가 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포의 사람들이 공자의 앞길을 막았다.
弟子有公良孺者, 以私車五乗従孔子.
제자 중에 공양유(公良孺)라는 자가 있어 개인의 수레 다섯 대를 가지고 공자를 따라 주유하고 있었다.
其為人長賢, 有勇力, 謂曰:
그는 키가 크고 사람됨이 어질며 용기와 힘이 있었는데, 그가 말했다.
「吾昔従夫子遇難於匡, 今又遇難於此, 命也已. 吾與夫子再罹難, 寧鬥而死.」鬥甚疾.
“내 이전에 선생님을 모시고 광(匡)에서 난을 당했었는데, 오늘 또다시 여기서 위험에 부딪히니 실로 운명인가보다. 내 선생님과 함께 다시 위험에 빠지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 싸움이 심히 격해졌다.
蒲人懼,123) 謂孔子曰:「苟毋適衛, 吾出子.」
포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공자에게 말했다. “만일 위(衛)나라로 가지 않는다면 그대를 놓아주겠소.”
與之盟, 出孔子東門. 孔子遂適衛.
공자가 맹약하자 그들은 공자 일행을 동문(東門)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공자는 끝내 위나라로 갔다.
子貢曰:「盟可負邪?」
자공이 말했다. “맹약을 저버려도 됩니까?”
孔子曰:「要盟也, 神不聴.」
공자가 말했다. “강요된 맹약은 신(神)도 인정하지 않는다.”
衛霊公聞孔子來, 喜, 郊迎. 問曰:「蒲可伐乎?
위 영공(衛靈公)은 공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교외까지 나가 영접하며 물었다.
“포(蒲)를 공격할 수 있습니까?”
対曰:「可.」
공자가 대답해 말했다. “있습니다.”
霊公曰:「吾大夫以為不可. 今蒲, 衛之所以待晉楚也,124) 以衛伐之, 無乃不可乎?」
영공이 말했다. “우리 대부(大夫)들은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포는 위(衛)나라가 진(晉)과 초 나라를 방어하는 요지인데 위나라가 직접 그곳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孔子曰:공자가 말했다.
「其男子有死之志,125) 婦人有保西河之志.126) 吾所伐者不過四五人.」127)
“그곳의 장정들은 모두 위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의지가 있으며, 부녀자들도 그들의 서하(西河) 땅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토벌하려는 사람은 반란을 일으킨 우두머리 4~5명에 불과합니다.”
霊公曰:「善.」然不伐蒲.
영공이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나 영공은 포를 공격하지 않았다.
霊公老, 怠於政, 不用孔子.
영공은 늙어 정사에 태만했고, 또한 공자를 등용하지도 않았다.
孔子喟然歎曰:「苟有用我者, 期月而已, 三年有成.」128)
공자는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만약 나를 등용하는 자가 있으면, 그 나라는 단 일 년 동안에 자리가 바로잡힐 것이요, 3년이면 구체적인 성과가 나타날 텐데.”
孔子行.
공자는 위나라를 떠났다.
仏肸為中牟宰.129) 趙簡子攻范、中行, 伐中牟. 仏肸畔, 使人召孔子. 孔子欲往.
불힐(佛肹)은 중모(中牟) 고을의 지방장관으로 있었다. 진(晉)나라의 조간자(趙簡子)가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격파하려 하자 중모에서 조간자에게 불복했기에 간자는 이 지역을 공격했다. 불힐이 이에 중모를 근거지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협조를 구하고자 공자를 초빙했다. 공자는 이에 응하려고 했다.
공자가 말했다. “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 또한 진정으로 강한 것은 갈아도 얇아지지 않고, 진정으로 하얀 것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 어찌 쓸모없는 박[匏]이 되란 말이냐? 어찌 매달려 있기만 하고 사람에게 먹히지 않을 수 있는가 말이다.”
공자가 이를 듣고 말했다. “유(由)야, 너는 왜 선생의 사람됨이 도를 배우는 데 권태를 느끼지 않고, 사람을 깨우치는 일에 싫증을 내지 않으며, 일에 열중해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으면서, 늙어가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去葉, 反于蔡. 長沮、桀溺耦而耕,
공자는 섭(葉)을 떠나 채나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 같이 밭을 가는 것을 보았다.
孔子以為隠者, 使子路問津焉.151)
공자는 그 사람들이 은자(隱者)라고 생각해 자로로 하여금 그들에게 나루터로 가는 길을 물어보도록 했다.
공자가 채나라로 옮긴 지 3년이 되던 해에 오나라는 진(陳)나라를 공격했다. 초 나라는 진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진보(陳父)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초 나라에서는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의 중간 지역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공자를 초빙했다. 공자가 가서 예를 갖추려고 하자,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이 의논해 말했다
“공자는 현인이다. 그가 비난하는 바는 모두 제후들의 잘못과 들어맞는다. 지금 그가 진나라와 채나라의 중간에 오래 머물고 있는데, 그간 여러 대부들이 한 행실은 모두 공자의 뜻에 맞지 않는다. 오늘의 초 나라는 큰 나라인데 공자를 초빙하려고 한다. 공자가 초 나라에 등용되면 우리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일하는 대부들은 모두 위험해질 것이다.”
於是乃相與発徒役囲孔子於野. 不得行, 絶糧. 従者病, 莫能興.164)
이에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각각 노역자들을 보내어 들판에서 공자를 포위했다. 그래서 공자는 초 나라로 가지 못하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따르는 제자들은 굶어 병들어 잘 일어서지도 못했다.
孔子講誦弦歌不衰. 子路慍見曰:「君子亦有窮乎?」
그러나 공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학술강의도 하고 책도 낭송하고 거문고도 타면서 지냈다. 자로가 화가 나서 공자에게 말했다.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孔子曰:「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165).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곤궁해도 절조를 지키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탈선한다.”
子貢色作.
자공이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했다.
孔子曰:「賜, 爾以予為多学而識之者與?」
공자가 말했다. “사(賜)야, 너는 내가 박학다식하다고 생각하느냐?”
曰:「然.166) 非與?」167)
자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孔子曰:「非也. 予一以貫之.」168)
공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나는 한 가지 기본 원칙을 가지고 전체의 지식을 통찰한 것뿐이다.”
孔子知弟子有慍心, 乃召子路而問曰:
공자는 제자들이 마음이 상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곧 자로를 불러서 물었다.
「詩云『匪兕匪虎, 率彼曠野』.169) 吾道非邪? 吾何為於此?」
“『시(詩)』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라고 했는데,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子路曰:「意者吾未仁邪? 人之不我信也.170) 意者吾未知邪? 人之不我行也.」171)
자로가 말했다. “아마도 우리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게지요. 아마도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게지요.”
공자가 말했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중유(仲由)야, 만약에 어진 사람이 반드시 남의 신임을 얻는다면 어째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겠느냐? 또 만약에 지혜로운 사람이 반드시 장애 없이 실행할 수 있다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심장을 해부당했겠느냐?”
子路出, 子貢入見.
자로가 나가자 자공이 들어와 공자를 뵈었다.
孔子曰:「賜, 詩云『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 吾何為於此?」
공자가 말했다. “사(賜)야,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라고 했는데,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子貢曰:「夫子之道至大也, 故天下莫能容夫子. 夫子蓋少貶焉?」
자공이 대답했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의 그 어느 국가에서도 선생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자신의 도를 약간 낮추지 않으십니까?”
孔子曰:「賜, 良農能稼而不能為穡,174) 良工能巧而不能為順.175)
공자가 말했다. “사야, 훌륭한 농부가 비록 씨 뿌리기에 능하다고 해서 반드시 곡식을 잘 수확하는 것은 아니고, 훌륭한 장인(匠人)이 비록 정교한 솜씨를 가졌을지라도 반드시 사용자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君子能脩其道, 綱而紀之, 統而理之, 而不能為容. 今爾不脩爾道而求為容. 賜, 而志不遠矣!」
군자가 그 도를 잘 닦아서 기강을 세우고 잘 통리(統理)할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세상에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너는 너의 도는 닦지 않고서, 스스로의 도를 낮추어서까지 남에게 수용되기를 바라고 있다. 사야, 너의 뜻이 원대하지 못하구나.”
공자의 수제자 자공
子貢出, 顔回入見. 孔子曰:
자공이 나가고 안회(顔回)가 들어와서 공자를 뵈었다. 공자가 물었다.
「回, 詩云『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 吾何為於此?」
“회야,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라고 했는데,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안회가 대답했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의 그 어느 국가에서도 선생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도를 추진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받아들여지지 않은 연후에 더욱 군자의 참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치욕입니다. 그리고 무릇 도가 잘 닦여진 인재를 등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수치입니다. 그러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 받아들여지지 않은 연후에 더욱더 군자의 참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孔子欣然而笑曰:「有是哉顔氏之子! 使爾多財, 吾為爾宰.」176)
공자는 기뻐서 웃으며 말했다. “그렇던가, 안씨 집안의 자제여! 자네가 만약 큰 부자가 된다면 나는 자네의 재무 관리자가 되겠네.”
공자의 수제자 안연
於是使子貢至楚. 楚昭王興師迎孔子, 然後得免.
그리하여 자공을 초 나라에 보냈다. 초 소왕(楚昭王)이 군대를 보내 공자를 보호하고 맞이하자 비로소 공자는 곤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昭王将以書社地七百里177)封孔子.
소왕이 장차 서사(書社)의 땅 7백 리로 공자를 봉하려고 했다.
楚令尹子西曰:「王之使使諸侯有如子貢者乎?」
그러자 초 나라의 재상 자서(子西)가 말했다.
“왕의 사신으로 제후에게 보낼 사람 중에서 자공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曰:「無有.」
“없습니다.”
「王之輔相有如顔回者乎?」
“왕을 보필할 신하 중에서 안회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曰:「無有.」
“없습니다.”
「王之将率有如子路者乎?」
“왕의 장수 중에서 자로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曰:「無有.」
“없습니다.”
「王之官尹有如宰予者乎?」曰:「無有.」
“왕의 장관 중에서 재여(宰予)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且楚之祖封於周, 号為子男五十里.
자서는 이어서 말했다. “하물며 초 나라의 선조가 주(周)나라로부터 봉함을 받았는데 그때 봉호는 자남작(子男爵)이었고, 봉지는 50 리였습니다.
今孔丘述三五之法, 明周召之業, 王若用之, 則楚安得世世堂堂方數千里乎?
지금 공자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치국방법을 말하고 주공(周公), 소공(召公)의 덕치를 본받고 있으니, 왕께서 만약 공자를 등용하신다면 초 나라가 어떻게 대대로 당당하게 다스려온 사방 수천 리 땅을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夫文王在豊, 武王在鎬, 百里之君卒王天下.
무릇 문왕(文王)은 풍(豐) 땅에서 일어났고, 무왕(武王)은 호(鎬) 땅에서 일어났지만 백리밖에 안 되는 작은 땅을 가진 군주가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던 것입니다.
今孔丘得拠土壌, 賢弟子為佐, 非楚之福也.」
지금 공자가 근거할 땅을 얻고 저렇게 많은 현명한 제자들이 그를 보좌한다면 이것은 우리 초 나라에 결코 좋은 일이 못 될 것입니다.”
昭王乃止. 其秋, 楚昭王卒于城父.
소왕은 이 말을 듣고 본래의 계획을 취소했다. 그해 가을, 초 소왕은 성보(城父)에서 죽었다.
楚狂接輿歌而過孔子,178) 曰:
초 나라의 미치광이 접여(接與)가 공자 앞을 지나가며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鳳兮鳳兮, 何徳之衰!179)
往者不可諫兮,180) 來者猶可追也!181)
已而已而, 今之従政者殆而!」182)
봉황새야, 봉황새야! 너의 덕은 어찌 이리 쇠락했니! 지난날의 잘못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앞날의 잘못이야 피할 수 있으리! 두어라, 그만두어! 지금 정치하는 자 다 위험하니까!
孔子下, 欲與之言.183) 趨而去, 弗得與之言.
공자는 마차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으나 그가 급히 피해버려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於是孔子自楚反乎衛. 是歳也, 孔子年六十三, 而魯哀公六年也.
이때 공자는 초 나라에서 위(衛)나라로 돌아왔다. 이해 공자의 나이는 63세였고, 때는 노 애공 6년이었다.
其明年, 呉與魯会繒, 徴百牢.184) 太宰嚭召季康子. 康子使子貢往, 然後得已.
그 다음해 오나라는 노나라와 증(繒)에서 회합하고 노나라에게 제사에 쓸 백뢰(百牢)를 요구했다. 태재(太宰) 비(嚭)가 계강자(季康子)를 소환했다. 강자(康子)는 자공을 초 나라로 보내어 응대케 함으로써 비로소 가축을 바치는 일을 모면하게 되었다.
孔子曰:「魯衛之政, 兄弟也.」
공자가 말했다.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치는 형제처럼 비슷하다.”
185)是時, 衛君輒父不得立, 在外, 諸侯數以為譲. 而孔子弟子多仕於衛, 衛君欲得孔子為政.
이때 위나라의 군주 첩(輒)의 부친 괴외(蒯聵)는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국외에 망명 중이었는데, 제후들은 위나라 군주에 대해 부친에게 양위해야 한다고 수차례 책망했다.
공자의 제자들 중에는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고 위나라 군주는 공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싶어했다.
子路曰:「衛君待子而為政, 子将奚先?」186)
자로가 말했다.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께 정사를 맡기고자 하는데 맡으신다면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슨 일을 제일 먼저 하시겠습니까?”
孔子曰:「必也正名乎!」187)
공자가 대답했다. “반드시 명분을 바르게 하겠다.”
子路曰:「有是哉, 子之迂也! 何其正也?」188)
자로가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을 절실하지 못하고 우원(迂遠)하다 하더니, 정말 그렇습니다. 무슨 명분을 바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정말 거칠구나, 유(由)야! 대저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성취되지 않으며, 일이 성취되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적중하지 않고, 형벌이 적중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다.
夫君子為之必可名, 言之必可行.191)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그래서 군자는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명분에 부합되어야 하고,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군자의 말에는 경솔함이 없어야 한다.”
其明年, 冉有為季氏将師, 與斉戦於郎, 克之.192)
그 다음해 염유(冉有)는 계씨(季氏)의 명을 받고 장군이 되어 낭(郎)에서 제나라와 싸워서 이겼다.
季康子曰:「子之於軍旅, 学之乎? 性之乎?」
계강자(季康子)가 말했다. “그대는 군사에 관한 것을 배웠는가? 아니면 본래 그 방면에 재주가 있는 것인가?”
冉有曰:「学之於孔子.」
염유가 말했다. “공자에게서 배웠습니다.”
季康子曰:「孔子何如人哉?」
강자가 말했다.“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対曰:「用之有名;播之百姓, 質諸鬼神而無憾. 求之至於此道, 雖累千社, 夫子不利也.」
염유가 대답했다. “공자를 등용하면 나라의 명성이 높아지고, 그의 정치방법은 백성들에게 시행하거나 신명에게 고하거나 간에 아무런 유감스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나와 같은 이 길을 걷게 한다면 비록 수천 사(社)를 준다 해도 공자는 그 이익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康子曰:「我欲召之, 可乎?」
“나는 공자를 초빙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対曰:「欲召之, 則毋以小人固之, 則可矣.」
“그를 부르고자 하신다면 그를 신임하시어 소인들이 그를 방해하지 못하게만 하신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而衛孔文子193)将攻太叔,194) 問策於仲尼.
이때 위(衛)나라의 공문자(孔文子)는 장차 태숙(太叔)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그 계책을 공자에게 물었다.
仲尼辞不知, 退而命載而行,
공자는 모른다고 사양하고, 곧 물러나 수레를 준비시켜 떠나면서 말했다.
曰:「鳥能択木, 木豈能択鳥乎!」195)
“새는 나무를 선택하며 서식할 수 있지만 나무가 어찌 새를 택할 수 있겠는가?”
文子固止. 会季康子逐公華、公賓、公林, 以幣迎孔子, 孔子帰魯.
문자는 공자를 한사코 만류했으나 마침 이때 계강자가 공화(公華), 공빈(公賓), 공림(公林)을 내쫓고 예물을 갖추어서 공자를 초빙했기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 애공이 정치에 관해서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의 근본은 신하를 잘 뽑는 데 있습니다.” 계강자도 정치에 관해서 질문하자 공자가 말했다. “정직한 사람을 뽑아서 부정직한 사람 위에 놓으면, 부정직한 사람도 정직해집니다.” 강자가 도적이 횡행함을 근심하자 공자가 말했다. “진실로 당신 자신이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비록 상을 준다 해도 백성들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했으며 공자 또한 관직을 구하지 않았다.
공자의 시대에는 주(周) 왕실이 쇠퇴해져 예악(禮樂)은 폐지되었고, 『시』와 『서』가 흩어졌다. 이에 공자는 3대의 예를 추적해 서전(書傳)의 편차를 정하되, 위로는 요(堯)와 순(舜) 임금의 시대부터, 아래로는 진 목공(秦繆公)에 이르기까지 그 사적을 순서에 따라 정리했다.
그리고 말했다. “하(夏)나라의 예는 내가 능히 그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 후 대인 기(杞)나라의 것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증명하기에 부족하다. 은(殷)나라의 예는 내가 말할 수 있지만 송(宋)나라의 것에 대해서는 증명하기에 부족하다. 만약에 기나라와 송나라의 문헌이 충분했다면 나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또 은과 하 나라 이래의 예가 손익(損益)된 것을 보고 말했다. “차후로는 비록 백세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예제(禮制)의 변천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은나라는 질박함을 귀히 여겼고 주나라는 문화(文華)함을 귀히 여겼기 때문이다. 주(周) 왕조는 하와 은 2대의 제도를 귀감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문화는 참으로 풍성하고 화려하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그러므로 서전(書傳)과 『예기(禮記)』는 공자로부터 처음으로 편찬되어 나왔다고 한다.
공자가 노나라의 태사(太師)에게 말했다. “음악을 연주하는 과정은 이해할 수 있다. 연주를 시작할 때에는 5음이 조화를 이루고, 그 다음으로는 청순하고 잘 어울려 끊이지 않고 잘 이어져 여운을 남김으로써 비로소 한 곡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이후에 비로소 음악이 바르게 되고 「아(雅)」와 「송(頌)」이 각기 제자리를 찾았다.”
옛날에는 시(詩)가 3천여 편이었으나 공자에 이르러 그 중복된 것을 빼고 예의에 응용할 수 있는 것만 취했다. 위는 설(契)과 후직(后稷)에 관한 시이고, 중간은 은과 주 나라의 성대함을 서술한 시이며, 아래는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의 실정(失政)에 관한 시에까지 이르렀다.
시의 내용은 임석(衽席) 등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풍(風)」은 「관저(關雎)」 편으로 시작하고, 「소아(小雅)」는 「녹명(鹿鳴)」 편으로 시작하고, 「대아(大雅)」는 「문왕(文王)」 편으로 시작하고, 「송(頌)」은 「청묘(淸廟)」 편으로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정리한 305편의 시에 공자는 모두 곡조를 붙여 노래로 부름으로써 “소(韶)”, 「무(武)」, 「아(雅)」, 「송(頌)」의 음악에 맞추려고 했다. 예와 악이 이로부터 회복되어 서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왕도가 갖추어지고 육예(六藝)가 완성되었다.
공자는 만년에 『역(易)』을 좋아해 「단(彖)」, 「계(繫)」, 「상(象)」, 「설괘(說卦)」, 「문언(文言)」 편을 정리했다. 그는 죽간을 꿴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만큼 『역』을 무수히 읽었다. 그가 말했다. “만약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을 더 준다면 나는 『역』에 대해서는 그 문사(文辭)와 의리(義理)에 다 통달할 수 있을 것이다.”
만년에 가장 많이 읽었다는 〈주역〉
孔子以詩書礼樂教,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 如顔濁鄒之徒,218) 頗受業者甚衆.
공자는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교재로 삼아 가르쳤는데, 제자가 약 3천명에 이르렀고, 그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도 72명이나 되었다. 그런가 하면 안탁추(顔濁鄒)와 같이 다방면으로 가르침을 받고도 72명의 제자 중에 들지 못한 자도 대단히 많았다.
공자는 네 방면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것은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이다. 그리고 네 가지를 금기시켰는데, 그것은 즉 ‘억측하지 말 것’, ‘독단하지 말 것’, ‘고집하지 말 것’,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말 것’ 등이었다. 그가 신중히 생각했던 것은 곧 재계(齋戒), 전쟁, 질병이었다. 공자는 이익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익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에는 반드시 운명과 결부시켜 말하거나 인덕(仁德)과 결부시켜 말했다. 공자는 제자를 가르칠 때 발분하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았고, 또 한 가지 문제를 가르쳐서 이와 유사한 다른 세 가지 문제를 물어오지 않으면, 다시 되풀이해서 가르치지 않았다.
공자는 군주의 궁문을 들어갈 때에는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했고, 그 앞으로 빨리 걸어 나아갈 때에는 단정하게 예의를 차렸다. 왕이 그에게 손님을 접대하게 명하면, 정성을 다하는 표정이었으며, 왕의 부름이 있을 때에는 마차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달려갔다.
魚餒, 肉敗, 割不正, 不食.236) 席不正, 不坐. 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
공자는 생선이 상했거나 고기가 부패했거나 또는 아무렇게나 잡아서 멋대로 잘라놓은 고기는 먹지 않았다.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고, 상(喪)을 당한 사람 곁에서 식사할 때에는 배불리 먹은 일이 없었다.
是日哭, 則不歌. 見斉衰、瞽者, 雖童子必変.237)
곡(哭)한 날은 종일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상복을 입은 사람이나 맹인을 보면 비록 그가 어린애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표정을 바꾸어 동정을 표시했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사람이 있다”라고 했으며, “덕을 닦지 않고, 학문을 강습하지 않고, 의로운 이치를 듣고도 좇아가 행하지 않고, 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은 것, 이 몇 가지가 바로 내가 우려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노래를 시켜보아서 잘 부르면 다시 부르게 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를 따라 불렀다
子不語:怪, 力, 亂, 神.241)
공자는 괴이한 것, 폭력, 문란한 것 그리고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子貢曰:「夫子之文章, 可得聞也.242) 夫子言天道與性命, 弗可得聞也已.」243)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의 시, 서, 예, 악에 대한 가르치심은 들을 수 있으나 선생님의 천도(天道)와 성명(性命)에 대한 가르치심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안연(顔淵)이 탄식하며 말했다. “선생님의 도학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깊이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앞에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홀연 뒤에 가 있다.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사람을 잘 이끌어주시고, 풍부한 전적과 문장으로 나를 박학하게 해주시고, 예의와 도덕으로 나를 절제하게 하시니, 내가 학문을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내 재주를 다해 보았지만, 그러나 선생님의 학문은 탁연히 내 앞에 우뚝 서 있어 아무리 따라가려고 해도 따라갈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달항(達巷)이라는 어떤 당(黨)의 사람이 말했다. “공자는 참으로 위대하도다. 그러나 아깝게도 박학하면서도 일예(一藝)에도 명성을 세우지 못했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나는 어느 예(藝)로 명성을 세울까? 마부가 될까? 사수가 될까? 나는 마부가 되련다.” 자뢰(子牢)가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나는 등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기예를 배울 수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魯哀公十四年春, 狩大野.251) 叔孫氏車子鉏商獲獣,252) 以為不祥.
노 애공 14년 봄에 대야(大野)에서 수렵을 했다. 숙손씨(叔孫氏)의 마부 서상(鉏商)이 괴상한 짐승을 잡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상서로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仲尼視之, 曰:「麟也.」取之.253) 曰:「河不出図, 雒不出書, 吾已矣夫!」254)
공자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그것은 기린이다.” 그제에서야 그들은 그것을 취해 돌아왔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옛날처럼 황하에서 다시는 용이 도판(圖版)을 메고 나타나지 않고, 낙수(洛水)에서 다시는 거북이 서판(書版)을 지고 나타나지 않으니, 나의 희망도 이제는 끝나는가보다.”
顔淵死, 孔子曰:「天喪予!255)」
안연이 죽자 공자는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及西狩見麟, 曰:「吾道窮矣!」256)
곡부(曲阜)의 서쪽에서 잡힌 기린을 보자 공자는 말했다. “도(道)를 행하려는 나의 희망도 이제는 다 끝났구나.”
喟然歎曰:「莫知我夫!」
공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나를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구나!”
子貢曰:「何為莫知子?」257)
자공이 말했다.“어째서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하십니까?”
子曰:「不怨天, 不尤人,258) 下学而上達,259) 知我者其天乎!」260)
공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래에서 인간사를 배워 위로 천명에 이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알아주는 이는 하늘뿐이 아니겠느냐!”
「不降其志, 不辱其身, 伯夷、叔斉乎!」261)
공자가 말했다.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아닌가!”
謂「柳下恵、少連降志辱身矣」.
또 말했다. “유하혜(柳下惠)와 소련(少連)은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했다.”
謂「虞仲、夷逸隠居放言,262) 行中清, 廃中権」.263)
또 말했다.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은 은거해 세상사를 논하지 않았고, 행동은 깨끗했으며, 자리에서 물러나 화를 면하는 방법도 시의적절했다.”
「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264)
“그러나 나는 그들과 다르다.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
子曰:「弗乎弗乎, 君子病没世而名不称焉. 吾道不行矣, 吾何以自見於後世哉?」
공자가 말했다.
“안 되지, 안 돼.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으니 그럼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는가?”
乃因史記作春秋,
이에 공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
上至隠公, 下訖哀公十四年, 十二公.
이것은 위로는 은공(隱公)에서 아래로는 애공(哀公) 14년까지 12공(十二公)의 시대를 포괄했다.
拠魯, 親周,265) 故殷, 運之三代.266)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고, 주나라를 종주로 하고 은나라의 제도를 참작해 하(夏), 상(商), 주(周) 3대의 법률을 계승하고 있다.
約其文辞而指博.
그 문사(文辭)는 간략하지만 제시하고자 하는 뜻은 넓다.
故呉楚之君自称王, 而春秋貶之曰「子」;
그래서 오나라와 초 나라의 군주가 왕을 자칭했지만 『춘추』에서는 그것을 낮추어 본래의 작위(爵位)인 자작(子爵)으로 칭했다.
践土之会実召周天子, 而春秋諱之曰「天王狩於河陽」:
천토(踐土)의 회맹(會盟)은 실제로는 제후가 주나라의 천자를 부른 것이지만 『춘추』에서는 그 사실을 피해서, “천자가 하양(河陽)으로 수렵을 나갔다”라고 기록했다.
推此類以縄當世. 貶損之義, 後有王者挙而開之.
이런 사안들을 들어서 당세(當世)의 법통을 바로잡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제후들에 대한 폄손(貶損)의 뜻은 후에 군주가 될 사람들이 이를 참고해 실행하게 하는 데 있다.
春秋之義行, 則天下亂臣賊子懼焉.
『춘추』의 대의가 행해지게 되면 곧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孔子在位聴訟, 文辞有可與人共者, 弗独有也.
공자는 지난날 소송안건을 심리했을 때에도 문사상(文辭上)의 다른 사람과 의논해야 할 때는 결코 자기 혼자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至於為春秋, 筆則筆, 削則削, 子夏之徒不能賛一辞.
그러나 『춘추』를 지을 때에는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했기 때문에 자하(子夏)와 같은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가 없었다.
弟子受春秋, 孔子曰:「後世知丘者以春秋, 而罪丘者亦以春秋.」267)
제자들이 『춘추』의 뜻을 전수받은 뒤, 공자는 말했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다.”
明歳, 子路死於衛. 孔子病, 子貢請見.
그 다음해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죽었다. 공자가 병이 나서 자공이 뵙기를 청했다.
또 자공을 보고 말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유해를 동쪽 계단에 모셨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고,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제 밤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
後七日卒.271)
그 후 7일이 지나서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무덤인 공림
孔子年七十三, 以魯哀公十六年四月己丑卒.272)
그때 공자의 나이는 73세로, 그것은 노 애공 16년 4월 기축일(己丑日)의 일이었다.
哀公誄之曰:
애공이 그를 애도하는 글을 지어 말했다.
「旻天不弔, 不憖遺一老,273)
俾屏余一人以在位, 煢煢余在疚.274)
嗚呼哀哉! 尼父, 毋自律!」275)
“하늘도 무심해 이 한 노인마저 남겨놓지 않고 데려가고,
나 한 사람만 여기다가 버려두어 외로움에 울게 하는구나!
아, 슬프다! 이부(尼父)여, 내 다시는 스스로에 얽매이지 않으리라!”
子貢曰:「君其不没於魯乎! 夫子之言曰:
자공이 말했다. “군주는 아마도 노나라에서 천명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이전에 말씀하시기를
『礼失則昏, 名失則愆. 失志為昏, 失所為愆.』276)
‘예법을 잃으면 질서가 무너지고, 명분을 잃으면 과오가 생긴다.
의지를 잃는 것은 혼란이고, 당위성을 잃는 것은 과실이다’라고 하셨는데,
生不能用, 死而誄之, 非礼也. 称『余一人』, 非名也.」277)
살아생전에 중용하지 못하고서 죽은 후에 애도하는 것은 곧 예의에 합당하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또 제후의 신분으로 ‘나 한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은 실로 명분에 맞는 말이 아니다.”
공자의 사당인 공묘
孔子葬魯城北泗上,278) 弟子皆服三年.
공자는 노나라 도성 북쪽의 사수(泗水) 부근에 매장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상복을 입었다.
三年心喪畢, 相訣而去,279) 則哭, 各复尽哀;或复留.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슬픔으로 3년 상을 다 마치고 서로 이별을 고하고 헤어졌는데, 헤어질 때 한바탕 통곡하고 각자 다시금 애도를 다했으며, 어떤 제자는 다시 머무르기도 했다.
唯子贛廬於冢上,280) 凡六年, 然後去. 弟子及魯人往従冢而家者百有余室, 因命曰孔里.
오직 자공만은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6년을 더 지키다가 떠나갔다. 후에 공자의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무덤가에 와서 집을 짓고 산 사람들이 1백여 가구나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곳을 ‘공자 마을’이라 했다.
魯世世相傳以歳時奉祠孔子冢, 而諸儒亦講礼郷飲大射於孔子冢. 孔子冢大一頃.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새해를 맞을 때마다 공자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으며, 많은 유생들도 이곳에 모여서 예의를 논하고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활쏘기를 했다. 공자의 무덤은 크기가 1경(頃)이나 되었다.
故所居堂弟子内, 後世因廟蔵孔子衣冠琴車書,281) 至于漢二百余年不絶.
공자가 살던 집과 제자들이 쓰던 내실은 훗날 공자의 묘(廟)로 만들어져, 공자가 사용하던 의관과 거문고, 수레, 서적 등이 소장되었는데, 그것은 한(漢)나라에 이르기까지 2백여 년 동안이나 그대로 있었다.
高皇帝過魯, 以太牢祠焉. 諸侯卿相至, 常先謁然後従政.
고황제(高皇帝)가 노나라를 지나게 되었을 때 태뢰(太牢)로써 공자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제후, 경대부, 재상이 부임하면 항상 먼저 공자의 묘를 참배한 연후에 정사에 임했다.
공자의 일대기를 정리한 성적도
孔子生鯉, 字伯魚.282) 伯魚年五十, 先孔子死.283)
공자는 이(鯉)를 낳았는데, 그의 자는 백어(伯魚)이다. 백어는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伯魚生伋, 字子思, 年六十二. 嘗困於宋. 子思作中庸.284)
백어는 급(伋)을 낳았는데, 그의 자는 자사(子思)이고, 62세까지 살았다. 자사는 일찍이 송(宋)나라에서 고생을 했고, 『중용(中庸)』을 지었다.
子思生白, 字子上, 年四十七.
자사는 백(白)을 낳았는데, 백의 자는 자상(子上)이고, 47세에 죽었다.
子上生求, 字子家, 年四十五.
자상은 구(求)를 낳았는데, 구의 자는 자가(子家)이고, 45세까지 살았다.
子家生箕, 字子京, 年四十六.
자가는 기(箕)를 낳았는데, 기의 자는 자경(子京)이고, 46세까지 살았다.
子京生穿, 字子高, 年五十一.
자경은 천(穿)을 낳았는데, 천의 자는 자고(子高)이고, 51세까지 살았다.
子高生子慎, 年五十七, 嘗為魏相.
자고는 자신(子愼)을 낳았는데, 자신은 57세까지 살았으며, 일찍이 위(魏)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子慎生鮒, 年五十七, 為陳王渉博士, 死於陳下.
자신은 부(鮒)를 낳았는데 부는 57세까지 살았으며, 일찍이 진왕(陳王) 섭(涉)의 박사(博士)가 되었고, 진(陳)에서 죽었다.
鮒弟子襄, 年五十七. 嘗為孝恵皇帝博士, 遷為長沙太守. 長九尺六寸.
부의 아우 자양(子襄)은 57세까지 살았는데, 일찍이 효혜황제(孝惠皇帝)의 박사가 되었다가 장사(長沙)의 태수로 옮겨갔다. 키가 9척 6촌이었다.
子襄生忠, 年五十七.
자양은 충(忠)을 낳았는데, 충은 57세까지 살았다.
忠生武, 武生延年及安国.
충은 무(武)를 낳았고, 무는 연년(延年)과 안국(安國)을 낳았다.
安国為今皇帝博士, 至臨淮太守, 蚤卒.
안국은 지금의 황제의 박사가 되었다가, 관직이 임회(臨淮) 태수에까지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安国生卬, 卬生驩.
안국은 앙(卬)을 낳았고, 앙은 환(驩)을 낳았다.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詩有之:「高山仰止, 景行行止.」
“『시경』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 간다’라는 말이 있다.
雖不能至, 然心郷往之. 余読孔氏書, 想見其為人.
내 비록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은 항상 그를 동경하고 있다. 나는 공자(孔子)의 저술을 읽어보고, 그 사람됨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適魯, 観仲尼廟堂車服礼器, 諸生以時習礼其家, 余祗迴留之不能去云.285)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묘당, 수레, 의복, 예기(禮器)를 참관했고, 여러 유생들이 때때로 그 집에서 예를 익히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는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우러나 머뭇거리며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天下君王至于賢人衆矣, 當時則栄, 没則已焉.
역대로 천하에는 군왕에서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생존 당시에는 영화로웠으나 일단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孔子布衣, 傳十余世, 学者宗之. 自天子王侯, 中国言六藝者折中於夫子,286) 可謂至聖矣!
그러나 공자는 포의(布衣)로 평생을 보냈지만 10여 세대를 지나왔어도 여전히 학자들이 그를 추앙한다. 천자, 왕후로부터 나라 안의 육예(六藝)를 담론하는 모든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 공자의 말씀을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그는 참으로 최고의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朝吾將濟於白水兮(조오장제어백수혜) : 아침에 나는 백수를 건너려하네 登閬風而繫馬(등랑풍이계마) : 낭풍산에 올라 말을 매어놓고 忽反顧以流涕兮(홀반고이류체혜) : 문득 돌아보니 눈물이 흘러내린다. 哀高丘之無女(애고구지무녀) : 높은 언덕에 여자 없음이 서러워하며 溘吾遊此春宮兮(합오유차춘궁혜) : 곧 나는 이러한 봄날의 궁전에 노닌다. 折瓊枝以繼佩(절경지이계패) : 보석 같은 꽃가지 꺾어서 노리개에 이어서 及榮華之未落兮(급영화지미락혜) : 이 화려한 꽃이 시들기 전에 相下女之可詒(상하녀지가이) : 이 꽃을 바칠 하계의 여자를 찾으리라. 吾令豐隆乘雲兮(오령풍륭승운혜) : 나는 풍륭을 시켜서 구름을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