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손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소를 지으며 체념할 수밖에...... 위태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어느날, 나는 허전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서고 있었다.
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면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서 떨어져 갈 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만날 때 이미 헤어질 준비를 하는 우리는, 아주 냉담하게 돌아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파오는 가슴 한 구석의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5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절실한 결론을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며 여겨보아도 결국 인간에게서는 더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6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7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러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 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추억을 인정하자 애써 지우려던 내 발자국의 무너진 부분을 이제는 지켜보며 노을을 맞자. 바람이 흔들린다고 모두가 흔들리도록 버려 둘 수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또 잊어야 했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순간은 육신의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 내 가슴에 쓰러지는 노을의 마지막에 놀라며 남은 자도 결국은 떠나야 한다.
아무도 객관적인 생각으로 남의 삶을 판단해선 안된다. 그 상황에 젖어보지 않고서 그의 고민과 번뇌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가졌던 그 숱한 고통의 시간을 느껴보지 않고서, 그누구도 비난해선 안된다. 너무 자기 합리화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지만 그래도 가슴 아득한 곳에서 울려나오는 절망은 어쩔 수 없고 네 개의 가시로 자신은 완전한 방비를 했다면 그것은 가장 완전한 방비인 것이다
나로 인해 고통 받는 자 더욱 철저히 고통하게 해 주라. 고통으로 자신이 구원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남이 받을 고통 때문에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일 뿐 그의 고통은 그의 것이다. 그로 인해 일어난 내 속의 감정은 그를 더욱 나약하게 만들 뿐 아닌 것은 언제나 아닌 것이다 그로 인한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결국은 옳은 길을 걸은 것이다.
나의 신을 볼 얼굴이 없다. 매일 만나지도 못하면서 늘 내 뒤에 서 있어 나의 긴 인생길을 따라다니며 내 좁은 이기심과 기회주의를 보고 웃으시는 그를, 내 무슨 낯을 들고 대할 수 있으리.
부끄러움으로 인해 자신을 돌아보지만 자랑스레 내어 놓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기에 좀더 살아 자랑스러운 것 하나쯤 내어 보일 수 있을 때가 되면 자신있게 신을 바라보리라 지만, 언제가 되어질지는, 아니 영원히 없을지도 모르겠기에 <나>가 더욱 작게 느껴지는 오늘 나를 사랑해야 할 것인가, 나는
나 인간이기에 일어나는 시행착오에 대한 질책으로 어두운 지하 심연에 영원히 홀로 있게 된대도 그 모두 나로 인함이기에 누구도 원망할 수 없으리 내 사랑하는 내 삶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나, 유황부에 타더라도 웃으려고 노력해야지. 내가 있는 그 어디에도 내가 견디기에는 너무 벅찬데 나를 이토록 나약하게 만든 신의 또다른 뜻은 무엇일까
보고 싶은 마음을오래 참으면별이 된다고작은 창으로 바라보는 하늘이유난히 맑다. 늘상 시행착오 속에 살면서나를 있게 해 준 신이나에게 원하는 게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숱한 밤을 밝혀도아직도 나는나의 얼굴을 모르고 있다.
2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역에서그냥 그렇게자신을 속이고 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지만발길을 막고 서 있는 건내 속에나 혼자 있는 게아니기 때문인가새로운 자리를 찾아나서는풀씨들만큼 충실한씨앗이 되지 못했다. 그리움이 익으면별이 된다고내 속에서 빛나는 건 미처 못 지운절망의 아픔들만아직도 눈을 뜨고 있다.
3
노래가 질펀한 거리를그대는 걷고 있다.시간은 내 속에 정지해 있고어쩌면 눈물만이 아프다. 혼자 불끄고 누울 수 있는용기가언제쯤이면 생겨날 수 있나모든걸 이해하고용서할 수 있을 때가나에게 있을까. 잊음조차 평온함으로 와 닿을 때아,나의 흔들림은이제야 끝났는가.
4
내가 준 고통들이지금 내가 안고 궁그는 아픔보다더 크고,그럴지라도그 맑은 미소가다시 피어나길 기도하는 것조차알량한 자기 위한일 뿐나에게 손 내밀어줄 신이정말 있을까. 흔들리지 말아야겠다는숱한 다짐들이어떤 바람에도 놀라게 한다.굳건히 설 수 있을 때까진잊어야지내 속에 흐르는 강물이결국은 바다로 간다는 걸깨닫기 까지.
5
나는 여기 있는데내 마음은 어디를 다니고 있는 지아직 알 수가 없다. 아프게 살아온 날들이모두 돌아볼 수 없도록 참담하고흔들리는 인간이흔들리는 나무보다 약하다.지하도를 빠져나오는 느낌이모두 같을지라도바람부는 날홀로 굳건할 수 있다면내 속에 자라는 별을 이제는하늘로 보내 줄 수 있을텐데 아직도 쓰러져 있는그를 위해나는 꽃을 들고 있다.
6
술잔 속에서 그대가웃고 있을때, 나는노래를 부른다,사랑의 노래를,보고 싶은 마음들은언젠가 별이 되겠지그 사랑을 위해목숨 걸 때가 있다면내 아픔들은 모두 보여 주며눈물의 삶을 얘기 해야지연기처럼 사라지는 인생을 위해썩어지는 육신을 위해우리는 너무 노력하고 있다. 노을의 붉은 빛을 닮은사랑의 얼굴로이제는 사랑을 위해내가 서야 한다.서 있어야 한다.
7
안다.너의 아픔을 말하지 않아도나만은 그 아픔을느낄 수 있기에 말하지 않는다절망조차 다정할 수 있을 때그대는 나의 별이 되어라.흔들리는 억새풀이 애처롭고그냥 보이지 않는 곳에서피었다 지는 들꽃이더욱 정겹다. 그냥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사랑하기 위해 애쓰자.사랑없는 삶으로우리는 자신을 속일 수 없다내 꿈으로 뛰운 별이이제는누구의 가슴에 가 닿을지를고민하지 말아야지.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사슴』.1936 ; 『백석전집』. 실천문학사. 1997 )
[네이버 지식백과]백석 [白石] - 빼어난 토속어 지향, 그 시적 보고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장석주)
여우난골족
[여우 난 골族]
- 백석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고무 고무의 딸 이녀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육십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려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이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불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깎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이름 뒤에 쓴 '方'은 상대방이 전세나 하숙을 하고 있을 경우 편지 봉투의 주인 이름 뒤에 사용하는 존칭의 하나.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본명(本名)은 백기행(白夔行)이고 아명은 백기연(白夔衍, 1915년에 백기행(白夔行)으로 개명)이며 1945년 일본국 패망 및 조선국 광복 후 사실상 백석(白石)으로 개명(改名)한 그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석(石)이라는 이름은 일본 시문학가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작품을 매우 좋아하여 그 이름의 석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생애
1912년평안북도정주군에서 백시박(白時璞)과 이봉우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백시박은자가 용삼(龍三)이고 후에 백영옥(白榮沃)으로 개명했다. 백영옥이 태어난 해는 1882년으로 되어 있으나 호적 신고를 몇 년씩 미루는 당시의 관습과 후에 백석의 신상조사서에 적힌 것으로 비춰볼 때 1875년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 기사 생활을 했던 아버지 백영옥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으나, 오산고보의 설립을 위한 건축기금을 마련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37세에 백석을 낳은 백영옥은 그를 귀하게 여겼다. 어머니 이봉우는 1888년생으로, 24세에 서울에서 시집을 왔다. 백석의 외조부 이양실과 그의 기생 출신 첩 사이에서 태어난 만큼, 나이 차가 많은 백영삼과 결혼했다. 그 시절 당시 결점(어머니가 아버지의 첩인 여성의 경우 등)이 있는 여성이 자신보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성과 결혼하는 것은 일반적인 특정 풍조였다.[2]그러나 어머니 이봉우는 매사에 정결하고 음식 솜씨가 뛰어나오산학교교장조만식은 자주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조만식은 아버지 백영옥과 친분이 있었고조선일보를 운영했던방응모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후에 백영옥이 하숙집을 시작할 때 백석 가족은 오산학교 앞쪽의 집으로 이사해 살았다.[3]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에 일본에서 1934년아오야마 가쿠인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34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산문 〈이설(耳說) 귀고리〉를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작가와 번역가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1월 20일에는 그간 《조선일보》와 《조광》(朝光)에 발표한 7편의 시에, 새로 선보이는 26편의 시를 보태어 시집 《사슴》을 당시 경성부 통의동(通義洞)에서 자비로 100권 출간했다. 이후 1948년 《학풍》(學風) 창간호(10월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내놓기까지 60여 편의 시를 여러 잡지와 신문, 시선집 등에 발표했으나 정작 시인 자신은 《사슴》 외에는 시집을 더 이상 출간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백석은 작품에 평안도 방언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의 사투리와 고어를 사용했으며 1948년 이후 많은 활동을 하지 못했다. 백석은 당시의 조선 땅(오늘날의 남북한)과만주일대를 유랑하며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한민족의 공동체적 친근성에 기반을 두었고 작품의 도처에는 고향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이 담겨 있다.
남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인이라는 이유로 백석 시의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1987년 월북 작가 해금 조치 이후로 백석의 많은 작품들이 활발히 소개되고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주목받고 평가되고 있다. 평북 지방을 비롯한 여러 지방의 사투리와 사라져가는 옛것을 소재로 삼아 특유의 향토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자기 관조로 한국모더니즘의 또다른 측면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64년경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한때 대한민국과 일본에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연구 결과 1996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주요 작품
《사슴》: 1936년 1월 20일 자가본(自家本)으로 발행한 시집이다.
《사슴》에는 총 33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1부 ‘얼럭소새끼의 영각’에 〈가즈랑집〉·〈여우난곬족(族)〉·〈고방〉·〈모닥불〉·〈고야〉(古夜)·〈오리 망아지 토끼〉 등 6편,
2부 ‘돌덜구의 물’에 〈초동일〉(初冬日)·〈하답〉(夏畓)·〈주막〉(酒幕)·〈적경〉(寂境)·〈미명계〉·〈성외〉 등 9편,
3부 ‘노루’에 〈산비〉·〈쓸쓸한 길〉·〈머루밤〉·〈노루〉 등 9편이 실려 있다.
4부 ‘국수당 너머’에 〈절간의 소이야기〉·〈오금덩이라는 곳〉·〈정주성〉(定州城)·〈통영〉(統營) 등 9편이 각각 실려 있다.
《사슴》의 판권지 상단에는 ‘詩集(시집) 사슴 百部 限定版 定價 二圓(100부 한정판 정가 2원)’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그 하단에는 ‘著作兼 發行者 白石(저작 겸 발행자 백석)’이라고 되어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938년에 발표한 시로 현실을 초월한 이상, 사랑에 대한 의지와 소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서행시초〉(西行詩抄): 1939년 《조선일보》에 재입사한 백석이 4회에 걸쳐 발표한 연시로 자신의 고향인 평안도를 여행하면서 발표한 작품이다.
〈팔원〉(八院): 연시 〈서행시초〉(西行詩抄)의 세 번째 시인 〈팔원〉은 승합자동차를 타고 여행하던 도중 차에 오르는 ‘나이 어린 계집아이’의 모습을 보고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한국 민족의 비극적 삶을 떠올리며 이를 형상화한 내용이다. 승합자동차 안팎의 상황을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행시초〉(南行詩抄): 《조선일보》에 4회에 걸쳐 발표한 연시로 경상남도 통영, 고성, 창원, 사천을 여행하면서 발표한 작품이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참회록 ㅡ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경상남도설천 문항리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냈고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에서 성장하며 소년기를 보내고 초등학교(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경상남도 하동과 전라남도광양에 거처를 두고 동래고보와 연희전문 문과,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왔다. 1948년부터 부산대학교, 1953년부터 연세대학교, 1957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서울대 박물관장, 학술원 정회원을 역임하였다.
일생
1922년 출생한 그는 3.1운동 후 교사를 하게 된 부친을 따라 1927년부터 경남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에서 성장하고 1934년, 부친이 전남 광양에 양조장을 겸비한 주택(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소재, 근대문화유산 등록)에서 사업을 열자 그곳에서 하동 집을 오가며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 학업을 위해 부산 동래, 서울 등으로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는 방학 동안 동생들과 함께 본가인 하동 덕천과 섬진강 하류를 사이한 광양 망덕에서 지냈다.
그는 시인 윤동주의 벗이자 후배로 연희전문 기숙사와 하숙에서 생활을 함께하고,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증정받아 일제의 눈을 피해 망덕의 집에서 지켜냈다. 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강제 징병으로 전장에 끌려가게 되자, 어머니께 소중한 원고니 꼭 지켜달라는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겨, 어머니는 마루바닥을 뜯고 보관했던 것이다. 윤동주가 옥사하고, 해방이 된 후 정병욱은 그 원고를 찾아 윤동주의 전문학교 동기 강처중, 동생 윤일주 등과 함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게 된다. 한글과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말의 탄압 속에서 윤동주의 시를 보존하고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인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그가 수필 <잊지못할 윤동주>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외에도 한국 고전문학 연구분야에 학문적 초석을 놓고, 주 전공인 고전 시가를 비롯해 국문학의 여러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판소리의 연구와 보존, 대중화 운동에도 선구적 업적을 남겨 판소리를 민족예술의 정화로 부활 계승토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부산대, 연세대학교 교수를 거쳐 27년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여러 권의 저서와 함께 수십 편의 수필도 남겼다.
또한 하버드대와 파리대학 초빙교수로서, 한국 고전 시가 논문 발표 및 강의 활동 외에도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 한국 문학 항목을 집필하였다. 그 외에도 유수의 권위있는 국제 학술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한국문학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학술적 업적으로 1967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1979년 외솔상, 1980년 삼일문화상을 받았으며 은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1] 현재 그가 살았던 전남 광양시 망덕에는 그의 집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존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며, 원고를 보관했던 마루 등이 남아있는데 원형을 복원 중이다.
1943년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치안유지법에 따른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8]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투옥과 최후
윤동주문학관에 전시된 윤동주의 묘비 사진
1945년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른 후 지린성룽징시에 유해가 묻혔다(향년 28세). 그의 조부 윤하현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그의 비석으로 사용하였다.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9]
1948년 2월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맞춰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임시로 발간하였고, 같은 해 3월 정식으로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10] 이후 1962년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1940년대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윤동주는,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교토도시샤(同志社)대학(일본 교토에 있는 미션스쿨) 영문과로 편입했다. 1943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고향의 부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향 여비를 좀 부쳐 주십시오. 돈이 도착하는 대로 곧 출발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뒤인 7월14일 윤동주는 일본 형사에게 체포된다.
이 무렵 ‘교토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 사건’이 발생했고, 그는 ‘조선독립 망상을 품은 죄’라는 죄목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때 고종사촌인 송몽규(교토제국대 문학부 재학)도 같은 혐의로 함께 수감됐다. 일제 경찰은 1년간의 윤동주와 송몽규의 미행-도청 기록을 보여줬다. 그들에게서 포착한 혐의는 당시 일제가 막 실시하려고 했던 ‘조선인 징병제를 역이용하는 모략활동’이었다. 일본은 이 혐의를 중대 범죄로 보았다. 이들에 대한 조사 기록이 일본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 작성한 특고월보(特高月報)에 실려 있다.
"안 맞겠다고 했는데도 강제로 주사를···"
미군 생체 해부를 증언한 일본인 의사 도노 도시오는, 당시 끔찍한 장면에 몸이 굳어있는 상황에서 한 일본군인이 이렇게 외쳤다고 말했다. "이놈은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총살을 당해야 할 놈이란 말이다." 일제가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생체 해부'를 감행했을 때의 논리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군대를 약화하기 위해 조선인 징병제를 방해하려는 자들이라고, 범행을 변명했을 것이다. 일제말의 이런 광기에, 시인 윤동주는 희생된 셈이다.
그가 숨진 뒤 부친 윤영춘은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아갔다. 함께 있던 송몽규의 모습 또한 이미 죽은 사람 같았다. 반쯤 깨진 안경을 걸친 그는 피골이 상접해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 했던 송몽규의 증언(송우혜의 ‘윤동주 평전’(2014년, 서정시학)은 이것이었다.
“난 안 맞겠다고 했는데도 맞아야 한다고 하며 강제로 주사를 맞게 합니다.”
윤동주가 사망한 뒤 일본인 간수들은 그의 사인을 ‘뇌일혈(뇌출혈)’이라 말하며 ‘하루만 늦었어도 규슈대학에 해부용으로 시체를 넘기려 했다’고 했다. 이 말은 도노 도시오의 증언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말이다.
윤동주는 학창시절 농구와 축구를 즐겼으며, 축구선수로 활약할 만큼 건강했다. 그의 친동생 윤혜원 씨는 윤동주를 ‘건강이 좋아 앓는 법이 없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랬던 그가 투옥 10개월 만에 뇌혈관이 터져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1945년 2월16일 새벽 3시36분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 땅의 28세, 그 순수하고 애국적인 영혼은 그렇게 꺼져갔다. 장례식은 3월6일 용정 집의 앞뜰에서 치러졌다. 용정 중앙장로교회 문재린 목사(문익환 목사의 부친)가 장례를 주관했다.
[미군 생체 해부] (본문中에서)
1945년 5월과 6월에 규슈제대 의학부에서는 B29 탑승 미군 8명을 생체 해부한 일이 있었다. (규슈제대 생체해부사건). 생체 해부를 한 까닭은 전쟁터에서 혈장 부족을 겪고 있어서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식염수로 된 대용(代用)혈장을 주입하는 의료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피를 뽑은 뒤 바닷물을 대신 ‘수혈’하는 실험을 했다는 얘기다. 고노오는 “이름모를 주사라는 말과 구주제대에 해부용으로 제공한다는 전보, 윤시인의 죽음과 구주제대 사건의 시기상의 일치 등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 실험에 의한 희생이라는 추정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고노에의 증언 중에서 미군 생체 해부는 확인된 바 있다.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TRA)의 요코하마 전범재판 기록이다. 자료에 의하면, 이 재판에는 일본 규슈제대 의학교수 5명이 회부됐다. 1945년 5월 5일 추락한 전투기에서 미군을 포로로 잡아 생체해부를 실험했다는 혐의였다. 수술대에 오른 포로들의 장기는 적출되고 몸에는 ‘바닷물 주사’가 꽂혔다.
[SBS 주시평 기자가 확인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 당시 규슈제국대학이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바닷물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SBS 뉴스 캡쳐본]
그의 시작활동은 1924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년『시문학』지에 시「선물」을 발표하여 그 잡지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로부터 「임께서 부르시면」·「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 초기 대표작들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들을 모아 1939년에 첫시집 『촛불』에 이어 1947년에는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를 간행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석정(辛夕汀))]
산중문답(山中問答)
ㅡ 조지훈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가 멍석자리 삽살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 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 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태고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난 사람 잘되어 오는 놈 하나 없데 소원이 뭐가 있는고 해마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 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랏일이나 잘 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問余何事棲碧山 (문이하사서벽산) 왜 산에 사냐고 내게 묻기에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대답 않고 웃으니 마음 절로 한가로워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물에 떠서 아득히 흘러가는 곳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여기는 신선이 사는 세상이지, 인간 세상 아니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