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2 내어다 보니 아주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앞 잦나무가 자꼬 커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 유리를 입으로 쫏다. 아아, 항 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소증기섯처럼 흔들리는 창. 투명한 보랏빛 누뤼알 아,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열이 오른다. 뺌은 차라리 연정스레히 유리에 부빈다. 차디찬 입맞춤을 마신다. 쓰라리, 알연히, 그싯는 음향- 머언 꽃! 도회에는 고운 화재가 오른다.
絶頂(절정)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耗(소모)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花紋(화문)처럼 版(판)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鏡道(함경도)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八月(팔월)한철엔 흩어진 星辰(성진)처럼 爛漫(난만)하다. 山(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2
巖古蘭(암고란), 丸藥(환약)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어 일어섰다.
3
白樺(백화) 옆에서 白樺(백화)가 髑髏(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白樺(백화)처럼 흴것이 숭없지 않다.
4
鬼神(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통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海拔六千呎(해발육천척) 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녀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여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山(산)길 百里(백리)를 돌아 西歸浦(서귀포)로 달어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힌 송아지는 움매 ─ 움매 ─ 울었다. 말을 보고도 登山客(등산객)을 보고도 마고 매여 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毛色(모색)이 다른 어미한틔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風蘭(풍란)이 풍기는 香氣(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濟州(제주) 회파람새 회파람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굴으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 ─ 솨 ─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측넌출 긔여간 흰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조친 아롱점말이 避(피)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 石茸(석이)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高山植物(고산식물)을 색이며 醉(취)하며 자며 한다. 白鹿潭(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여 山脈(산맥)우에서 짓는 行列(행렬)이 구름보다 莊嚴(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여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긔지 않는 白鹿潭(백록담)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 不具(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좇겨온 실구름 一抹(일말)에도 白鹿潭(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白鹿潭(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祈禱(기도)조차 잊었더니라.
絶頂(절정)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耗(소모)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花紋(화문)처럼 版(판)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鏡道(함경도)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八月(팔월)한철엔 흩어진 星辰(성진)처럼 爛漫(난만)하다. 山(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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巖古蘭(암고란), 丸藥(환약)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어 일어섰다.
3
白樺(백화) 옆에서 白樺(백화)가 髑髏(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白樺(백화)처럼 흴것이 숭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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鬼神(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통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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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海拔六千呎(해발육천척) 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녀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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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山(산)길 百里(백리)를 돌아 西歸浦(서귀포)로 달어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힌 송아지는 움매 ─ 움매 ─ 울었다. 말을 보고도 登山客(등산객)을 보고도 마고 매여 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毛色(모색)이 다른 어미한틔 맡길것을 나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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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蘭(풍란)이 풍기는 香氣(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濟州(제주) 회파람새 회파람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굴으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 ─ 솨 ─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측넌출 긔여간 흰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조친 아롱점말이 避(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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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 石茸(석이)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高山植物(고산식물)을 색이며 醉(취)하며 자며 한다. 白鹿潭(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여 山脈(산맥)우에서 짓는 行列(행렬)이 구름보다 莊嚴(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여 붙인채로 살이 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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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도 긔지 않는 白鹿潭(백록담)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 不具(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좇겨온 실구름 一抹(일말)에도 白鹿潭(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白鹿潭(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祈禱(기도)조차 잊었더니라.
이원록 선생은 1927년 10월 18일 있었던 일제 수탈의 상징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의 배후로 지목돼 체포됐다. 그때 수감번호 264가 시인 이육사가 된 계기가 됐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여러 번 고쳐 쓰다 이영우님의 권고로 李陸史로 고정하였다 한다. 하단에 상설함.
이원록 선생은 1927년 10월 18일 있었던 일제 수탈의 상징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의 배후로 지목돼 체포됐다. 그때 수감번호 264가 시인 이육사가 된 계기가 됐다.
이원록 선생은 이육사 외에도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이원록 선생이 사용한 필명은 이활과 한자를 달리한 3가지 뜻의 이육사가 있다. 이육사의 첫 번째 뜻은 죽을 육의 역사 사를 사용해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집안 어른의 권유로 바꾼 육지 육에 역사 사라는 한자를 사용하는 '이육사'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익히 알고 있는 시인 이육사의 뜻이다. 마지막 이육사의 뜻은 고기 육에 설사 사다. 고기 먹고 설사 한다는 뜻의 이름은 기자 활동할 때 일제를 비아냥대는 뜻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1930년 1월 중순에 동맹휴학이 시도되었고 6월에도 동맹휴학이 단행되었으며, 대구에서도 10월에 대구농림학교, 1931년 1월에는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가게 되었음.
이육사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졸업 (1931년~1933년)
관련인물 : 김원봉, 윤세주
서대문감옥 수감 (1934년 6월)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됨.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음. 일본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 있으며, 체포 후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남.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보고내용은 육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기록내용 : "배일사상, 민족자결 , 항상 조선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음 .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베이징 소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1944년 1월 16일)
1943년 7월, 모친과 형의 소상(小喪)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 후,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 및 베이징으로 압송됨.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뚱(東廠胡同, 일제시기에는 東昌胡同) 1호에서 순국.(이곳에는 당시 일제의 문화특무공작기관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가 있었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가 시신 거두어 화장하고, 동생 원창에게 유골 인계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됨(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
李陸史로 고정함
원록의 필명은 여러 가지가 있고, 호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있어 기재한다.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며,'李活'과 '戮史', '肉瀉'를 거쳐 '陸史'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1929년 이육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肉瀉'라는 이름은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으로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1932년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했을 적 대구 약령시에 대한 기사를 네 차례 연재할 때 사용되었다.
이육사의 필명이나 호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李活(1926-1939), 大邱二六四(1930), 戮史(1930), 肉瀉(1932), 陸史(1932-1944)와 같고 이원록이 '陸史'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1943년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7]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투옥과 최후
윤동주문학관에 전시된 윤동주의 묘비 사진
1945년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른 후 지린성룽징시에 유해가 묻혔다(향년 27세). 그의 조부 윤하현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그의 비석으로 사용하였다.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지러 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8]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