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 가, 깨달음에 뿌리를 내리소서.)
*위 주문(呪文)의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토말 :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 억양을 부드럽게 했을 때
(산스크리트어 한역)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한자음 한국어 음역)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한국말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영 어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해 석 : Gate Gate 가라. 가라. paragate 피안으로 건너가라. parasamgate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라. bodhi svaha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라.
가라. 가라. 피안으로 건너가라.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라.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라.
아미타불 (阿彌陀佛)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를 가리키는 신앙대상. 부처.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를 가리키는 신앙대상이다. 중국 인도의 범어 내용을 따라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라고도 한다. 살아 있는 모든 자를 구제하고자 48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을 거쳐 본원을 성취하고 10겁 전에 부처가 되었는데 지금도 서방의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다. 뭇 생명 있는 자들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통해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정토교가 성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미타신앙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대부분의 사찰에서 극락전에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 한국인이라면 대개 알고 있는 불교 주문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다.
'나무'란 산스크리트어로 '귀의하다'는 의미다.
위 주문은 한국의 불교 신앙인들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 대한 의존도가 그만큼 큰 것을 의미한다.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고통이나 희망사항을 그분들에 대한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사불산(四佛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제26대 진평왕 당시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사불산의 산마루에는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587년(진평왕 9) 붉은 비단으로 싸인 이 석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왕이 와서 예배하고 이 바위 옆에 절을 창건하고 대승사라 하였으며, 망명비구(亡名比丘)를 청하여 절을 맡기고 사면석불의 공양을 올리게 하였다. 망명비구는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였으며, 죽고 난 뒤 무덤에 한 쌍의 연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고종 때 상주목사 최자(崔滋)는 대승사의 서남쪽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조선 초기 기화(己和)가 이 절의 조전(祖殿)에 있으면서 『반야경』을 연구하였고, 반야사(般若社)를 결성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1604년(선조 37)부터 1701년(숙종 27)까지 법당을 비롯하여 승당(僧堂)·동상실(東上室)·관음전·조전·미륵전·중실(中室)·시왕전(十王殿)·향로전(香爐殿)·천왕문(天王門)·만세루(萬歲樓)·침계당(枕溪堂)·금당(金堂)·영자전(影子殿)·향적전(香積殿)·응향전(凝香殿)·나한전(羅漢殿)·청심전(淸心殿) 등을 신축하였다.
이 중 금당은 1692년(숙종 18)에 지었는데, 미면사(米麵寺: 白蓮寺) 삼존불을 옮겨 봉안하였다. 1727년(영조 3) 종각을 단장하였고, 1730년 금강문(金剛門)을 지어 금강역사상과 문수보살·보현보살상을 모셨으며, 다음해 천왕문과 금강문·일주문을 단장하였다.
그 때의 산내 암자로는 미륵암(彌勒庵)·사불암(四佛庵)·상적암(上寂庵)·대비암(大妃庵)·묘적암(妙寂庵)·묘봉암(妙峰庵)·윤필암(閠筆庵)·문수암(文殊庵)·보현암(普賢庵) 등 9암이 있었다. 1725년 의학(義學)이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이때 아미타불의 복장(腹藏)에서 사리(舍利) 1과와, 신룡(神龍) 1년(705) 금으로 쓴 『화엄경』 7권이 나왔다.
1862년(철종 13) 명부전(冥府殿)과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자 의운(意雲)·취월(就越)·덕산(德山) 등이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 4) 누각 등을 건립하였다. 1872년 의운이 극락전을 중건하였고, 이듬해 누각 밖으로 석축을 쌓고 회랑 30여 칸을 신축하였다.
1899년 월파(月波)가 중심이 되어 염불당(念佛堂)을 만들고 미타계(彌陀契)를 설치하였으며, 환경(幻鏡)·화응(華應)·학송(鶴松) 등은 동별당(東別堂: 祖師堂)에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치하여 7년 동안 정진하였다. 이때 동별당이 좁고 퇴락하여 많은 승려들이 정진할 수 없었으므로 1906년 동별당 동쪽에 건물을 짓고 쌍련암만일회(雙蓮庵萬日會)를 개설하였다. 1956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1966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극락전·나한전·시왕전·선원·요사채 등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묘적암·윤필암·상적암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1973년 보물로 지정된 대승사목각탱화부관계문서 4매, 1989년 보물로 지정된 금동보살좌상, 1988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 사적비와 아미타불상에서 나온 금자 『화엄경』 7권, 석가모니 사리 1과 등이 있으며, 창건설화에 얽힌 사불암과 그 아래에 세워진 대웅전은 조화를 이루어 신비감을 준다.
죽령(竹嶺) 동쪽 1백리 가량 떨어진 마을에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46년 갑신(甲申)註 249에 홀연히 사면이 한 발이나 되는 큰 돌에 사방여래(四方如來)註 250를 조각하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감싼 것이 하늘로부터 그 산 정상에 떨어졌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쳐다보고 예경한 후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
≪법화경(法華經)註 251≫을 외우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를 청하여 절을 맡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돌을 공양하며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고 하며, 혹은 사불산(四佛山)註 252이라고도 한다. 비구가 죽자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서 연(蓮)이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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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49진평왕 9년(587)은 간지로 정미(丁未)이고, 갑신(甲申)은 진평왕 46년(624)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다.
註 250사방의 불국토에 사는 부처를 말한다. 동방 아축불(阿閦佛), 서방 아미타불, 남방 보생불(寶生佛), 북방 미묘성불(微妙聲佛)을 가리킨다.
註 251≪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약칭이며 ≪연경(蓮經)≫이라고도 한다.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7권 28품으로 이루어졌다. 천태종·법상종의 소의경전이다.
註 252경상북도 문경시 대승사(大乘寺)가 위치한 산으로, 산 위 바위에 새겨진 사방불에 이하여 산 이름이 지어졌다.
男兒到處是故鄕 (남아도처시고향) 남아가 가는 곳 그 어디나 고향이건만 幾人長在客愁中 (기인장재객수중) 나그네 시름에 겨운 사람 그 몇 이던가 一聲喝破三千界 (일성갈파삼천계) 한 소리 질러 온 우주를 깨우쳐 밝히니 雪裡桃花片片紅 (설리도화편편홍) 펄펄 날리는 눈 속에 복사꽃이 보인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나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 구나.
– 경허선사 –
백운자각(白雲自覺 :흰구름에 깨달은 마음)
自有靑山路(자유청산로) 白雲那得留(백운나득유)
나그네 가슴에 푸른 산의 길이 있거늘, 흰 구름이 어떻게 잡을 수 있으리까.
– 동진선사 –
靑來藍表靑(청래람표청) 絳來 表絳(강래천표강)
푸른 물감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욱 푸르고, 붉은 물감이 꼭두서니에서 나왔으나 꼭두서니보다 더욱 붉다.
– 운파선사 –
서광(西光 : 부처님의 광채)
西風吹動雨初歇(서풍취동우초헐) 萬里長空無片雲(만리장공무편운) 虛室戶居觀衆妙(허실호거관중묘) 天香桂子落粉紛(천향계자락분분) 서쪽(부처님의 광채) 바람이 불어오자 비로소 비 개이니, 높고 넓은 하늘에 한 조각구름도 없다. 빈 선실에 고요히 앉아 모든 묘리를 생각하니, 천향의 계수 열매가 어지럽게 떨어지네.
무슨 일로 무심히 수서에 누워 있는가, 다만 세상을 잊고 깊숙한 토굴을 사랑하기 때문이네. 차 솥은 객을 위해 깊은 아궁이를 열었는데, 약초밭은 사람들을 꺼려 조그만 시내를 격해 있노라. 비개인데 뿌리는 비 소리는 소나무 늙고 또 젊었는데, 찬 서리 다가오는 가을빛은 산 높고 또 낮다. 숲 속의 새가 또 와서 잠을 깨게 하는구나, 산승이 자니(紫泥 : 세속)의 꿈을 꿀까 두렵다
벽돌을 쌓고 모래를 덮고 그 가운데 국화를 심어 아침 노을 즐기네 붉은 꽃송이 이슬을 머금으니 바람 앞에 연약하고 푸른 잎 서리를 능멸하나 가을이 되어야 아름다운 것을 깨끗한 연못의 울타리엔 그 빛깔 끊임없고 울타리 없는 집 안에는 많은 꽃이 피어있네 선실의 창문 아래 홀로 앉아 있노라면 어느덧 해 저문다.
부처님의 밝은 법향 해동에 널리 펴졌고, 가을의 서리 월하(月下)의 뜰에 내렸다. 누구(중생)를 향한 마음 고래로 굳건한데, 나의 마음 춘하추동 푸르다. 만개한 촛불 법상에 빛나고, 그림자처럼 객이 떠난 깨끗한 정자이런가, 미동도 없이 단좌(端坐)하니 선경(禪經)이 확연하네.
자연을 초월하는 선사의 깨침은 청아하다 못해 생멸(生滅)도 없어 보인다. 당시 쇠잔해지는 지리의 등불에 불을 켠 선사는, 삶에 있어서 허망 속에 내재한 진실된 그 무엇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이의 구현에 힘쓰라고 가르쳤다. 선사께서 깨친 혜안은 현종(玄宗 : 현묘(玄妙)한 종지(宗旨), 즉 부처님(佛)의 통각(通覺))이다. 세속적 물욕에서 벗어나 청아한 삶을 살라는 선사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미혹한 중생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전체가 나타나려니, 이 본체를 어떻게 말 할 수 있으리요. 물 속 달빛은 허공에서도 볼 수 있으나, 무심의 거울은 비추어도 항상 허공이로다. 골짜기 흐르는 물은 쪽물인 것 같고, 문밖의 청산은 자연 그대로이다. 산색, 물소리에 전체가 드러났으니, 그 속에서 무생(無生 : 모든 법의 실상은 생멸(生滅)이 없는 것)의 깨달음을 얻었노라.
선사의 오송(悟頌)은 담연(澹然)하기가 물 속의 달과 같다. 또한 선사의 깨침은 담화(曇花)이다. 담화(曇花:구름 꽃, 꽃구름, 하늘의 해와 달을 비유한 것, 즉 우담화(優曇花:상상 속의 식물, 3천년 만에 한번씩 꽃이 핀다는 꽃이다. 우담화는 하늘에 떠오른 태양을 뜻하며, 또한 사랑과 음덕의 주체를 뜻한다)로서 우리 중생들에게 임천(林泉:수풀과 샘물)이 되었다
– 취여선사 –
心燈(심등)
微言宴應(미언연응) 卽心無心(즉심무심)
부처님의 미묘한 말씀 그윽이 통하는 것이나, 마음은 항상 즉해 있으면서도 본래 없는 것이다.
– 신행선사 –
일심무애(一心無碍)
筏師旣捨矣(벌사기사의) 舟子何繫焉(주자하계언)
큰 배를 이미 버렸거늘, 어찌 작은 배에 매여 있으리요.
– 무염국사 –
무문(無聞)
眼耳元來自沒 (안이원래자몰종) 箇中誰得悟圓通(개중수득오원통) 空非相處飜身轉(공비상처번신전) 犬吠驢鳴盡豁通(견폐노명진활통) 눈과 귀는 원래 자취가 없거늘, 누가 그 가운데서 원만히 깨칠 것인가. 텅 비어 형상 없는 곳에서 몸을 굴리면, 개 짖음과 나귀 울음이 모두 도(道)를 깨침이네.
이후 왕사께서는 중국 연도(燕都)에 들어가 법원사(法源寺)에 주석하고 있는 지공 선사(指空禪師)를 찾았다. 지공이 물었다.“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누가 그대를 여기 오라하던가.” “고려에서 혜근이 스스로 왔습니다.”지공은 허락했다. 이후 왕사는 지공 문하에서 수참(修參)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지공은 왕사에게“하늘의 해와 땅의 조사를 모두 다 쳐부수어, 그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무엇인가” 물었다. 왕사는“안팎이 다 붉다”면서 대각(大覺)을 이루게 되었다. 왕사의 입에서 금구(金口 : 부처님의 입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황금이나 금강에 비유한 말)가 흘러 나왔다.
대원(大圓)
包塞虛空絶影形(포색허공절영형) 能含萬像體常淸(능함만상체상청) 目前眞景誰能量(목전진경수능량) 雲卷靑天秋月明(운권청천추월명) 허공을 꽉 싸안은 그 모습 뛰어나, 온갖 형상 머금었어도 몸은 항상 깨끗하다. 눈앞의 참 경개(景槪)를 누가 능히 헤아리니,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가을 달은 밝아라.
– 나옹선사 –
불각화(佛覺華 : 부처님의 꽃)
普光明殿是吾家(보광명전시오가) 三法一源初睡起(삼법일원초수기) 百十由旬一念收(백십유순일념수) 世間時 都爲爾(세간시겁도위이)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설하신 곳(보광명전)은 그대로 나의 집이요, 삼법(敎法ㆍ行法ㆍ證法)의 한 근원에 첫잠이 깨다.
멀고도 너무 멀어서 생각하기 힘든 거리 한 생각에 거둬들이니, 세간의 시간이야 모두 헛된 것이구나.
국사께서는 부처님의 법이 자연 자체인 것을, 또한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마는 국사의 수행은 끝이 없었다.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무릎에 먼지가 쌓여 새발자국이 찍히며 머리카락은 억새풀처럼 변하여 허수아비처럼 되는 선정에 들고는 하였다. 이렇게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선정에 들어있던 어느 날 천지각(天地覺)을 하였다.
부질없이 소림(중국에 있는 절)만을 생각하다 / 어느덧 구레나룻은 희끗희끗 / 부처님 열반후 불교가 크게 펼쳐진 곳〔비야리(毘耶離)〕의 옛날은 소리도 냄새도 없고 / 마가다(摩竭陀ㆍ불멸 후 처음으로 불교가 펼쳐진 곳)의 음향은 끊어졌어라 / 말뚝인 양 앉아 있으니 일체분별 사라지고 / 바보처럼 지내라노니 시비심 일지 않네 / 헛된 생각일랑 산문 밖으로 날려 보내고 / 온종일 세사(世事)를 잊고 푸른 산만 마주한다
– 부용선사 –
일념회광(一念廻光)
趙州老露刀劍 조주노로도검 唱夢中說夢漏 창몽중설몽루
조주란 늙은이의 칼날이 드러나니 어허, 꿈속에서 꿈을 말함이라 선사의 오도송에서 나타난 것처럼 선사께서 추구하신 깨달음의 참구는 활구선이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도(道)를 생각함으로 길고 깊은 인연 오늘에까지 이어졌네 장춘을 물처럼 흘려보냈는데 다시 장춘동일세. 범해가 일구월심 구하는 것이 범해 마음인데 대나무 속에서 시(詩)와 함께 찻잔만 기울인다. 소나무 아래서 소나무와 벗하여 거문고 소리 즐기다 보니 덧없이 세월만 가고 낡은 수레바퀴처럼 되었고 8월의 교교한 달빛만 양 가슴속에 남았네.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나는 가운데, 여러 무리와 함께 길을 가던 석가모니는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길바닥에 (죽은 사람의 뼈로 추정되는) 해골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머리를 숙이는 부처,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조선 1432년, 목판본, 절첩식 한 면 33.5×11.3cm, 보물(붉은 선: 필자 표시), 증346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왕사성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삼만팔천인의 대비구와 보살들과 함께 계시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대중을 거느리고 남방으로 가시다가, 한 무더기의 뼈를 보시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예배를 올리셨다. 이에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삼계의 큰 스승이요 사생(死生)의 자비로운 어버이시기에, 수많은 사람이 공경하고 귀의하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름 모를 뼈 무더기에 친히 절을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나의 으뜸가는 제자 중 한 사람이요 출가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아직 아는 것이 넓지 못하구나.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가 어쩌면 내 전생의 조상이거나 여러 대에 걸친 부모의 뼈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예배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울 것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남자가 세상에 살아있을 때는 큰 옷을 입고 띠를 두르고 신을 신고 모자를 쓰고 다니기에 남자인 줄 알며, 여인은 붉은 주사와 연지를 곱게 바르고 좋은 향으로 치장하고 다니므로 여자인 줄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의 백골은 남녀가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제자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보라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 절에 가서 법문도 듣고 경도 외우고 삼보께 예배하고 염불도 하였을 것이므로, 그 뼈는 희고 무거우니라. 그러나 여자는 세상에 있을 때 정과 본능을 좆아 자녀를 낳고 기르나니, 한번 아기를 낳을 때 서너 되나 되는 엉긴 피를 흘리고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모유를 먹이기 때문에 뼈가 검고 가볍느니라.” 이 말을 듣고 아난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껴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여야 어머니의 큰 은덕에 보답할 수 있겠나있까?” (중략)
열 가지 어머니 은혜를 그린 그림
경의 제목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부모의 은혜가 한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며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경전이란 뜻입니다. 줄여서 <부모은중경>이라 하는데, 사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부모은중경>의 여러 이본(異本) 중 하나입니다. 이 경은 중국 당대 중반부터 송대(宋代)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하, <부모은중경>)이 경전이 우리나라에 언제 전래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제작된 많은 판본이 전합니다. 현재 전하는 판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378년 제작된 판본이므로, <부모은중경>은 고려 말에는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경전은 조선이 효를 강조한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불교 경전임에도 <법화경>, <금강경>과 함께 가장 많은 판본이 제작되어 전합니다. 경전의 제목은 부모의 은혜로 적었지만, 내용은 대부분 어머니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이 <부모은중경>은 태종(太宗, 1367~1422)의 후궁이었던 명빈 김씨(明嬪 金氏, ?~1479)가 발원(發願)하여 간행한 불경(佛經)입니다. 나무에 글과 그림을 새긴 뒤 종이에 찍어 병풍 형식으로 접어 만들었습니다. 조선 전기 <부모은중경>의 경전의 도상(圖像)과 조선 전기 왕실의 신앙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미가 있어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1125호)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중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부모은중경>에는 어머니의 열 가지 은혜[十恩]를 구체적으로 열거하였으며 이어 그림으로 나타낸 변상도(變相圖)에는 각 내용을 상징적인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열 가지 은혜와 이를 묘사한 그림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으로, 어머니가 임신하여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몸가짐을 조심하는 은혜입니다. 집안 내부로 보이는 공간에 의자에 앉은 여인이 있습니다. 임신한 어머니를 그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으로, 해산이 임박한 어머니가 괴로움을 이기는 은혜입니다. 가옥 안에 시녀를 동반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회탐수호은’과 유사한 도상이지만, 앉아 있는 곳에 휘장이 쳐져 침상 주인이 해산에 임박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으로, 아이를 낳은 다음 모든 근심을 잊은 은혜를 말합니다. 침상에 앉아 있는 여인이 어머니이며 그림 하단에는 목욕을 시키는 시녀와 아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어머니의 은혜를 먼저 적고 이를 이미지로 가시화하였습니다.
오른쪽부터 제1 회탐수호은, 제2 임산수고은, 제3 생자망우은
오른쪽부터 제4 인고토감은, 제5 회건취습은, 제6 유포양육은
오른쪽부터 제7 세탁부정은, 제8 원행억념은, 제9 위조악업은, 제10 구경인민은
나머지 네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어머니의 은혜를 살펴봅니다.
넷째,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먹이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다섯째, 아기는 마른자리에 뉘고 자신은 진자리에 눕는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일곱째,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여덟째, 떨어져 있는 자식을 걱정하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아홉째, 자식을 위해 몹쓸 짓도 감히 하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열째,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변상도는 새김이 깔끔하여 이미지가 명확합니다. 인물들은 얼굴 형태가 갸름하고 이목구비를 단아하게 묘사하여 표정까지 살필 수 있으며, 옷주름을 묘사한 선도 정교하고 유연합니다. 이 판본은 왕실 발원본으로 사실적인 밑그림과 정교한 새김이 어울려 훌륭한 도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판각할 때 새로 밑그림을 그려서 새겼으며 고려본보다도 그림 표현과 새김이 우수합니다.
정조, 다시 부모은중경을 탄생시키다
국왕으로서 효심이 깊었던 정조(正祖, 1759~1800)는 명(命)으로 <부모은중경>을 조성하도록 하였습니다. 국왕의 명령으로 나라에서 조성되었기에 이 경전은 다른 사찰 간행본에 비해 판식이 정교하고 서체가 아름다우며 변상도도 매우 화려합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조선 1796년, 용주사간본, 구3381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조선 1796년, 용주사간본, 구3381
정조가 <부모은중경>을 간행한 배경은 여러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특히 부모의 은혜를 강조하는 경전을 제작하도록 명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이습니다. 정조가 전라도 장흥 보림사에 갔을 때 보경(寶鏡)이라는 승려가 이 경전을 바쳤는데 정조가 이에 감화 받아 용주사를 창건했으며, 경판을 새겨 용주사에 보관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조의 뜻에 따라 <부모은중경>은 변상도를 갖춘 한문본과 언해본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용주사 간행본(刊行本)은 석가모니불가 해골을 보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모습이 앞서 언급된 보물 <부모은중경>보다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머지 화면도 인물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구도가 꽉 차 보입니다.
자비하신 어머니 그대를 낳으신 날 오장육부 모두를 쪼개고 헤치는 듯 육신이나 마음이 모두 다 기절하고 짐승잡은 자리인 듯 피를 흘렸어도 낳은아기 씩씩하고 어여쁘다 말들으면 기쁘고도 기쁜마음 무엇으로 비유할까 기쁜마음 정해지면 또다시 슬픈마음 괴롭고도 아픈 것이 온몸에 사무치네
④ 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 : 쓴 것은 삼키시고 단 것은 먹여주신 은혜)
무겁고도 깊은 것이 부모님의 크신 은혜 사랑하고 보살피심 한결같아 끓임없네 단음식은 다뱉으니 드실음식 무엇이며 쓴음식만 드시면서 기쁜얼굴 잃지않네 사랑하심 증하시어 깊은정은 다함없네 지중하신 은혜처럼 슬픔또한 더하시어 다만어린 아기에게 잘먹일 것 생각하니 자비하신 어머니는 굶주려도 기쁜마음
⑤ 회간취습은(廻乾就濕恩 : 젖은 자리에 누우셔서 마른 자리에 뉘어주신 은혜)
어머니 당신몸은 젖은자리 누우시고 아기는 받들어서 마른자리 눕히시네 가슴의 두 젖으로 목마름을 채워주고 고우신 소매로는 찬바람을 가려주네 아기를 돌보시어 잠들때가 없으셔도 아기의 재롱으로 큰기쁨을 삼으시네 오로지 어린아기 편안할 것 생각하고 어머니 자비하심 편안함도 잊으셨네
⑥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 : 젖을 먹이시며 키워주신 은혜)
어머니의 증한은혜 땅에다 비유하랴 아버님의 높은은덕 하늘에 비유하랴 하늘은혜 땅의은혜 아무리 크다해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큰은혜 그를 넘네 아기비록 눈없어도 미워함 없으시고 손과발이 불구라도 싫어함 없으시네 배가르고 피를나눠 친히낳은 자식이라 종일토록 아끼시고 사랑하심 한량없네
⑦ 세탁부정은(洗濯不淨恩 :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
생각컨대 그옛날의 아름답던 그얼굴과 아리따운 그몸매는 곱기만 하셨었네 두눈썹은 푸른버들 가른 듯 하셨었고 두빰의 붉은빛은 연꽃을 닮으신 듯 은혜가 깊을수록 그모습 사라지고 더러운것 씻느라고 맑은얼굴 상하셨네 한결같이 아들딸만 사랑하고 거두시다 자비하신 어머니의 얼굴마저 시드셨네
⑧ 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 : 멀리 떠날때면 걱정해 주신 은혜)
죽어서 헤어짐도 슬프고 괴롭지만 살아서 헤어짐은 더욱더 서러워라 자식이 집을나가 먼길을 떠나가니 어머니 모든생각 타향에 나가있네 주야로 그 마음은 아들을 따라가고 흐르는 눈물줄기 천줄기 만줄기네 원숭이 달을보고 새끼생각 울부짖듯 간장은 염려하는 생각으로 다끓기네
무애 양주동(1903년 6월 24일, 경기도 개성 - 1977년 2월 4일 )선생님께서 향가연구서인 《고가연구》를 출간하자 위당 정인보(1893∼1950)선생님이 그 위업을 고시 5수로 찬양했다. 그 고시가 <詞腦歌 證釋 題詞> 인데 무애 선생은 이를 번역하고 해설하여 수필집 등에 등재한 글들이다. 그 글이 아래의 논문이다.
이 블로그에서는 注譯 중 전문성을 요하는 注는 생략하고 번역시만 옮겨 보고자 한다. 주석 부분이 필요한 분들은 아래 논문집을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