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의 선승(禪僧) 동안상찰(同安常察)이 조동종(曹洞宗)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 등을 칠언율시 형식으로 노래한 10수의 게송(偈頌).
중국 선종(禪宗)의 한 종파인 조동종의 승려 동안상찰이 지은 게송으로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29권에 실려 있다. 조동종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 등을 칠언율시 형식의 10수로 지은 것인데, 각 수의 제목은 심인(心印)·조의(祖意)·현기(玄機)·진이(塵異)·연교(演敎)·달본(達本)·환원(還源)·회기(廻機)·전위(轉位)·일색(一色)이다.
본고에서는 十玄談要解에서 金時習이 經典 및 禪語錄을 통해 자신의 思想을 어떻게 펼쳐나가는지 살펴보았다. 김시습은 天台의 五時敎判과 같이 『阿含經』․『方等經』․『般若經』․『法華經』과 『涅槃經』의 순서로 敎判하고 있었는데, 특히 김시습은 『법화경』과 『열반경』의 교의를 중추로 삼고 있었다. 김시습은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기보다는 부정하거나 역설하는 방식으로써 부처의 본의를 알음알이로 헤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祖師禪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禪語錄을 引用하여 「十玄談」의 원문내용을 直截하게 표현함으로써 조사선의 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미루어 볼 때, 김시습은 「십현담요해」를 저술할 당시에 이미 경전 및 선어록을 통해서 自由自在로 자신의 사상을 펼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보디 스와하(bodhi svaha)는 ’깨달음의 기반에 뿌리를 내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진언은 ’가라,가라, 저너머로 가라, 완전히 저너머로 가라, 깨달음의 기반에 뿌리를 내려가‘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진언 전체를 비유해서 말하면, ’저 너머의 해안[피안]으로 가라‘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시작을 알 수 없는 아주 먼 옛날부터 무지한 중생들의 집이 되어 버린 이 윤회의 해안을 버리고 궁극적인 열반과 완전한 해탈의 해안으로 건너가라‘는 뜻입니다.
반야바라밀다 진언은 <반야심경>의 숨겨진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부처님의 경지로 이끄는 수행의 다섯 가지 단계와 공성의 이해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진언에서 처음의 ‘가떼(가라)’는 공덕을 쌓는 단계인 자량도資糧道의 단계로 들어가서 수행하라고 권고하는 것이고,
두 번째 ‘가떼’는 ‘공성’을 깊이 지각할 수 있는 마음을 닦는 수행을 권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빠라가떼(저 너머로 가라)’는 공성을 개념의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깨닫는 단계인 견도見道로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견도의 단계로 들어간 수행다는 ‘고귀한 존재[성자聖者]’가 된 것입니다.
‘빠라상가떼(완전히 저 너머로 가라)’는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서 공성에 지극히 익숙해진 명상의 단계[수도修道]에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티베트어로는 명사을 ‘곰(gom)'이라고 하는데, ’곰‘은 원래 ’습관‘이라는 뜻입니다. 이 진언의 마지막에 나오는 ’모디 스와하‘는 깨달음의 기반에 단단히 뿌리내리라는 권고입니다. 즉, 궁극적인 열반으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경지로 이끄는 수행의 다섯 단계인 자량도資糧道, 가행도加行道,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등을 <반야심경>의 본문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처음부분에서 ‘공성’을 네 가지 측면으로 설명하는 부분, 즉 “형상은 공성이고, 공성은 형상이다.
공성은 형상과 다른 것이 아니며, 형상도 공성과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자량도와 가행도라는 두 단계에서 공성을 닦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모든 현상은 공성이다. 현상들은 규정된 특징들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은 견도의 단계에서 공성을 통찰하는 양식을 설명합니다.
“무지도 없고, 무지의 소멸도 없다”는 문장은 수도의 단계에서 공성을 닦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그러므로, 사리자여, 보살은 성취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며 그 안에 머문다”는 문장은 보살의 최고단계인 금강삼매 상태에 머물면서 공성을 닦는 것을 설명합니다.
수행자의 수행 단계가 실제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수행자가 삼매에 들어있을 때입니다. 수행의 처음 단계에서는, 즉 자량도에 있을 때는 공성과 현상의 본성을 주로 지성적인 면에서 이해합니다.
예리한 지성을 가진 보살 수행자는 이타적인 보리심을 일으키기 전에 공성을 깊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지성적으로 그다지 예리하지 않은 수행자는 모든 중생을 해탈시키고 싶다는 열망을 먼저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공성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보리심을 강화시키고 보완하면서 강한 영향을 줄 것입니다.
공성을 깊이 이해하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그 생각은 모든 중생을 향해 강한 자비심을 기르는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자량도에서는 주로 배우고 깊이 생각하고 지성적으로 이해하는데서 공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자기가 배운 것에 대해서 명상함으로써 공성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다가 결국은 명료하게 공성을 통찰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가행도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공성을 직접적으로 통찰하지는 못하지만, 더 이상 지성적인 이해나 개념적인 이해에 머물지 않고 보다 체험적으로 공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가행도의 단계에 있는 동안에 공성을 점진적으로 더 깊고 세밀하고 명료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공성을 이해하려고 개념을 매개체로 사용하는 일이 점점 사라집니다. 주관과 객관, 관습적인 존재와 내재하는 실재 등의 이원론적인 지각이 모두 사라질 때 견도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이 단계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주관적인 경험과 그 대상이 섞여 마치 물에 물을 부은 것처럼 되고, 개념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공성에 대해 명상하게 됩니다.
수도修道의 단계에서는 공성을 더 깊이 직접 체험할수록 수행하는 자는 다양한 번뇌들을 체계적으로 없애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번뇌가 남아 있는 보살의 일곱 단계’라고 하는 초지初地부터 제7지地까지 발전합니다. 보살은 이 일곱 단계들에서는 번뇌가 완전히 근절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번뇌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제8지, 9지, 10지의 단계에서는 번뇌가 남긴 인상과 성향까지도 모두 없앱니다. 마지막으로, 궁극적 진리와 관습적 진리를 한 순간에 동시에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를 제거할 때 부처님의 전지全知한 마음이 생깁니다.
~ 달라이 라마 존자님의 반야심경 中 에서
Photo : 2015년 4월 14일 일본 도쿄 법회 마지막 날에 대만그룹과 함께 하신 달라이 라마 존자님
3차 BC 250년경 아쇼카왕(인도통일) 구전에서 문자로 정착되기 시작하여 부파불교시대에 많은 경전들이 다투어 결집됨.
4차 서력기원후 부파불교시대를 거쳐 불교의 논리화 체계화를 위하여 수 많은 대승경전이 결집됨. 재언하면 한국은 한문 불경을 통하여 불교와 접촉할 수 있어 한문경전 번역 이후에야 口傳의 원시경전을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수행승 석가모니불께서 다른 수행자들에게 구송(口誦)한 시구를 한국어로 구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自利利他의 종교로 알려진 불교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않고, 중생의 善(公共의 이익)을 봉행하고, 자기 마음을 스스로 깨끗이 한다.
이것이 여러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다.]
너무나 단순하고 소박하여 시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더 덧붙일 말도 없다. 가르침의 본질에다 덧칠을 하면 군더더기가 붙어 되려 본질만 흐리게 할 뿐이다. 대중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 크게 보면 國利民福이 善이다.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짓거지, 그것은 惡이다. 크게는 나라를 팔아 私利私慾을 챙기는 일이다. 자기 스스로 善을 지향하고 惡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개인들은 자기 스스로 뜻과 마음을 맑고 투명하게 하는 일뿐이다.
學僧으로서 역경사업에 쏟으신 열정과 길상화님의 시주로 이뤄진 길상사의 창건은 세상에 널리 회자되는 얘기여서 백석의 시와 함께 이 블로그에도 몇 꼭지 올렸다.
正法 전달을 위해 역경에 전력투구하시고 수행승으로서도 철저한 자기관리로 '無所有'의 전범(典範)을 보이신 법정스님의 명복을 빕니다.
[해설] 참조
이 책은 <남전대장경南傳大臧經>에 수록되어 있는 <숫타니파타Suttanipata>를 완역한 것이다. ‘숫타Sutta’는 ’말의 묶음經‘, ’니파타nipata’는 ‘모음集’이란 뜻으로, 두 단어가 합쳐져 ‘말의 모음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숫타니파타는 경전을 모은 것이라는 뜻이다. 불교의 많은 경전 중에서도 가장 초기에 이루어진 경전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과 의미가 크다.
이 경전이 이루어진 배경은 이러하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간추려 간결한 산문의 형태로 묶었다. 암송하기 쉽게 하여 구전되었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후세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최초에는 부처님이 즐겨 쓰던 마가다어(북인도 마가다 지방에서 그는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됐다)로, 또는 마가다어의 영향력이 큰 속어의 일종으로 구송되다가 그후 팔리어로 정착됐다. 현재는 팔리어 성전聖典(남전대장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경전처럼 시와 짧은 글귀로 결집되어 전해진 또 하나의 경전이 <담마파다Dammapada> 다시 말해 <진리의 말씀(법구경)>이다. 이러한 경전들은 대개 아쇼카 왕(기원전 268년에 즉위 232년까지 다스림)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보는데, 그 중에서도 숫타니파타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제4장 ‘여덟 편의 시’와 제5장 ‘피안에 이르는 길’은 다른 장보다도 더 일찍 이루어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평가한다. ( ··· 중략 ··· )
이 <숫타니파타>는 모두 1,149수의 시를 70경에 정리, 이것을 다섯 장으로 나누고 있다. 그 다섯 장이 ‘뱀의 비유蛇品’, 작은 장小品‘, ’큰 장大品‘, ’여덟 편의 시義品‘, ’피안에 이르는 길彼岸道品‘으로 이 중에서 ’여덟 편의 시‘와 ’피안에 이르는 길‘ 등 세 장은 처음에는 독립된 경전으로 유포되었던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