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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卷第四
元曉不羈
[원효불기, - 원효, 구애되지 않다]
ㅡ 영원한 自由人[不羈]
聖師元曉 俗姓薛氏
성사 원효(聖師元曉)의 속성은 설씨(薛氏)이다.
祖仍皮公 亦云赤大公
그의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今赤大淵側有仍皮公廟 父談捺乃末
지금 적대연(赤大淵) 곁에 잉피공의 사당[廟]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내말 담날(乃末談捺)*이다.
* 신라 관등 11등급에 해당하는 내마(柰麻)벼슬을 한 지방관리로서, 이름은 담날(談捺)이다.
初示生于押梁郡南(今章山郡) 佛地村北 栗谷娑羅樹下
(원효스님은) 압량군[押梁郡: 지금의 장산군(章山郡)] 남쪽, 불지촌(佛地村)의 북쪽에 있는 율곡(栗谷: 밤나무골)의 사라수(娑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村名佛地 或作發智村(俚云弗等乙村)
불지촌이란 마을 이름은 발지촌[發智村: 속언에는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 함]이라고도 쓴다.
* 석가모니께서 열반한 장소에 있던 나무.
娑羅樹者 諺云
사라수(娑羅樹)의 유래에 대해서 세속에 전하는 바로는 이러하다.
師之家本住此谷西南
원효스님의 집이 본래 율곡의 서남쪽에 있었다.
母旣娠而月滿 適過此谷栗樹下 忽分産
그 어머니가 [스님을] 잉태, 만삭이 되어 마침 그 골짜기, 즉 율곡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해산을 했다.
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 而寢處其中
너무 급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그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두고 그 속에 누워 해산했다[寢處其中].
因號樹曰娑羅樹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其樹之實亦異於常 至今稱娑羅栗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보통 나무와 달리 특이하여 지금도 그것은 사라율(娑羅栗)이라 불리고 있다.
古傳 昔有主寺者 給寺奴一人 一夕饌栗二枚 奴訟于官
옛부터 전하기를, 옛적 어떤 주지[主寺者]가 그 사노(寺奴)들에게 하룻저녁의 저녁밥거리[一夕饌]로 한 사람 앞에 밤 두 알씩 나누어 주곤 했다. 사노들이 불만을 품고서 관가에 고소를 했다.
官吏怪之 取栗檢之 一枚盈一鉢
관리가 이상스러워 그 밤을 가져다가 검사해 보았더니, 밤 한 개가 발우(鉢盂) 하나에 가득 찼다.
乃反自判給一枚 故因名栗谷
그러자 그 관리는 도리어 사노 한 사람에게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그 밤나무가 있는 산골짜기를 율곡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師旣出家 捨其宅爲寺 名初開
원효스님은 출가하고 나서 그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어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樹之旁置寺曰娑羅
그리고 원효스님이 태어났던 그 밤나무 곁에도 절을 지어 사라사(娑羅寺)라고 했다.
師之行狀云 是京師人 從祖考也
원효스님의 행장(行狀: 전기)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조부의 본거지를 따른 것이다.
唐僧傳云 本下湘州之人
당 <승전(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사람이라고 했다.
按麟德二年間 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 置歃良州
살펴보건대[按] 당 고종 16년[麟德 2年] - 즉 문무왕 즉위 5년(A.D. 665) 중에 문무왕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 일부를 떼어서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했으니,
則下州乃今之昌寧郡也 押梁郡本下州之屬縣
하주는 바로 오늘날의 창녕군에 해당하고, 압량군은 본래 하주에 소속된 고을[屬縣]이다.
上州則今尙州 亦作湘州也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이니 또한 상주(湘州)라고도 쓴다.
佛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원효스님이 태어난]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곧 압량군에서 나누어진 한 구역이다.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幢者俗云毛也)
원효스님의 아명은 서당(誓幢)이요, 제명(第名)은 신당[新幢: <당>은 세속에선 털(毛)이라고 한다]이다.
初母夢流星入懷 因而有娠 及將産 有五色雲覆地
당초 그 어머니는 별똥[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스님을] 잉태했는데, 해산하려고 할 때에는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眞平王三十九年 大業十三年丁丑歲也
스님의 탄생은 진평왕 즉위 39년, 수나라 양제 대업(大業) 13년(丁丑年: A.D. 617)에 있었다.
生而穎異 學不從師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기가 남달라서[穎異] 스승을 모시지 않고 독력으로 배웠다.
其遊方始末 弘通茂跡 具載唐傳與行狀 不可具載
그가 수도를 위해 사방으로 구름 가는 듯한 행적[遊方]의 시말과 불교의 홍통(弘通)에 남긴 그의 성대한 업적은 당<승전>과 그의 행장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일일이 다 지적하지 않고,
唯鄕傳所記有一二段異事
단지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의 특이한 일만을 기록하겠다.
師嘗一日風顚唱街云
어느 날, 스님은 춘의(春意)가 발동하여[風顚] 다음과 같은 시가를 지어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誰許沒柯斧
수허몰가부, 누가 자루 없는 도끼[沒柯斧]를 주려나,
我斫支天柱
아작지천주, 하늘 받칠 기둥[支天柱]을 찍어내련다.
人皆未喩 時太宗聞之曰
사람들은 모두 이 시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지 못했다. 다만 그때 태종 무열왕이 듣고서 말했다.
此師殆欲得貴婦 産賢子之謂爾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國有大賢 利莫大焉
나라에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이익이 그보다 클 수가 없지!"
時瑤石宮(今學院是也)有寡公主
그때 요석궁[지금의 학원(學院)이 그곳이다]에 홀로 된 공주가 있었다.
勅宮吏覓曉引入
무열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스님을 찾아 요석궁으로 인도해 들이게 했다.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來過蚊川橋(沙川 俗云牟川 又蚊川 又橋名楡橋也)遇之
궁리가 왕명을 받들고 원효를 찾아 다니다가,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사천>이니, 속담에는 <모천> 또는 <문천>이라 하고, 다리 이름은 유교(楡橋)라 한다]를 지나는 스님을 만났다.
佯墮水中濕衣袴
스님은 일부러[佯] 물에 빠져서 함빡 옷을 적셨다.
吏引師於宮 褫衣曬㫰 因留宿焉
궁리는 스님을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 거기서 옷을 끌러 말리도록 했다. 이리하여 스님은 그 요석궁에 유숙하게 되었다.
公主果有娠 生薛聰
聰生而睿敏 博通經史 新羅十賢中一也
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
요석공주는 과연 임신을 하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천생(天生)의 자질이 영민했다. 널리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했으니 신라 10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방음[方音: 우리나라 말. 여기서는 <이두>를 가리킴]으로 중국과 우리나라[華夷]의 풍속과 사물 이름에 통회(通會)하고 육경(六經) 문학을 훈해(訓解)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이 땅의 경서 수업자[業明經者]들이 전수하여 이어 오고 있다.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원효스님은 이미 파계하여 총을 낳은 뒤로는 세속의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사기에는 <小性居士>로 되어 있음]라 일컬었다.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우연히 광대[優人]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형상이 진기했다.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命名曰無碍 仍作歌流于世
스님은 광대의 그 박의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一切無碍人 一道[一乘]出生死>에 의거하여 무애(無碍)란 이름으로 그 도구를 명명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노래 <무애가>를 지어 세상에 퍼트렸다.
嘗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歸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스님은 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고 널리 교화를 펼치고 돌아왔다.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陀之號 咸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
이리하여 저 오두막집의 더벅머리 아이들[桑樞瓮牖玃猴상추옹유확후]까지도 모두 불타의 명호를 알게 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게 했으니, 원효스님의 교화는 참으로 크기도 하다.
其生緣之村名佛地 寺名初開 自稱元曉者 蓋初輝佛日之意爾
그가 태어난 마을을 불지촌이라 이름하고, 그의 집을 희사하여 만든 절을 초개사라 이름하고, 그리고 또 자칭 원효(元曉)라고 한 것들은 모두 불일(佛日)을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元曉亦是方言也 當時人皆以鄕言稱之始旦也
원효라는 말도 또한 우리나라 말[方言]에서 뜻이 취해진 것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우리나라 말[鄕言]로써 [원효스님을] 새벽[始旦]이라고 불렀다.
曾住芬皇寺 纂華嚴䟽 至第四十廻向品 終乃絶筆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러 있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저술했는데 제4권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그만 붓을 그쳤다.
又嘗因訟 分軀於百松 故皆謂位階初地矣
또 언젠가는 공적인 일[公]로 인해서 몸을 일백 소나무[百松]에 나누었으므로 모두들 위계(位階)의 초지(初地: 환희지)라고 일렀다.
亦因海龍之誘 承詔於路上 撰三昧經疏
스님은 또한 바다용의 권유에 의하여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고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를 저술했다.
置筆硯於牛之兩角上 因謂之角乘 亦表本始二覺之微旨也
그것을 저술할 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 두고 했다고 해서 그것을 각승(角乘)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각승이란 또한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오묘한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大安法師排來而粘紙 亦知音唱和也
대안(大安)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으니[경의 차례를 매김] 역시 의미를 알고 둘이서 주고받은 것[知音唱和]이다.
旣入寂 聰碎遺骸 塑眞容 安芬皇寺 以表敬慕終天之志
스님이 입적하자 아들 총은 그 유해를 가루내어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해 두고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뜻을 표했다.
聰時旁禮 像忽廻顧 至今猶顧矣
설총이 그때 스님의 소상(塑像) 곁에서 배례했더니, 소상이 홀연 돌아다 보았다.
지금도 소상은 여전히 돌아다 보는 모습 그대로 있다.
曉嘗所居穴寺旁 有聰家之墟云
원효스님이 일찍이 거처한 적이 있던 혈사(穴寺) 곁에 설총의 집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讚曰, 그를 찬(讚)한다.
角乘初開三昧軸
각승초개삼매축, 각승(角乘)을 지어 삼매경의 중추되는 뜻 처음 열어 보이고
舞壺終掛萬街風
무호종괘만가풍, 표주박 들고 춤을 추며 거리마다 교화를 베풀었네.
月明瑤石春眠去
월명요석춘면거,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이 깊더니
門掩芬皇顧影空 廻顧至
문엄분황고영공 회고지,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 보는 모습만 남았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0536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https://www.youtube.com/watch?v=SFmeflzMoLc&t=349s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778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2/11/07/2002110770275.html
'영문판 원효전서'의 제1권과 제2권은 원효의 주저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담았으며,
제3권은 대승불교와 관련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판비량론(判比量論)' '이장의(二障義)'가 들어 있다.
또 제4권은 '화엄경소(華嚴經疏)' '열반종요(涅槃宗要)' '본업경소(本業經疏)' 등 경전 주석과 교의(敎義)를 논한 글이,
제5권에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등 불교 의식과 신행(信行)을 다룬 글이 각각 수록됐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4%A4%EC%B4%9D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91%90
광의의 이두는 구결, 향찰 등을 포함하여 한자를 빌려 이뤄진 한국어 표기법 전체를 가리킨다. 협의의 이두는 이두문에 나타나는 한국어의 한자 표기를 이른다. 이두문이란 이서(吏胥)들이 행정 문서를 작성할 때 사용한 한자 표기의 산문을 이르는데 같은 문체로 쓰인 민간의 글도 이두문이라 부른다. 여기서는 협의의 이두에 관해 언급한다.
이두의 성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신라시대에 시작하여 남북국 시대에 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자료에는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는 기술이 나오지만 진평왕 때의 서동요나 진흥왕의 순수비문에 쓰인 것이 있어 설총이 창작한 것은 아니고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5세기부터 고구려에서는 한문을 한국어 어순으로 재배치하거나, ‘之’자를 문장의 종결어미로 사용했다.[1]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6세기 말 이후 차자 표기법 (이두)이 정체 또는 퇴조하였고, 신라에서는 반대로 6세기 말부터 7세기로 접어들면서 표기법상의 큰 발전을 이루었다.[1]
표기법
이두문에서는 명사, 동사 어간 등 단어의 실질적 부분에서 주로 한자어가 사용되고, 조사(助詞)나 어미(語尾) 등 문법적 부분에서 주로 이두가 사용되었다.(명사, 동사 부분에서 이두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음) 한반도에서는 한자를 도입한 뒤에 한동안은 정규 한문만 사용되었다고 추측되는데, 그 후 한국어 어순에 맞춰 글을 쓴 서기체(誓記體)와 같은 의사한문(擬似漢文)이 나타난다. 이두는 이와 같이 한국어 어순으로 쓰인 의사한문에 문법적 요소가 더 보완되어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두는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는데, 한자 독법은 옛날부터 있는 관습적인 독법이 내려와 있다. 그 중에는 중세 한국어와도 다른 독특한 것도 있다. 예) 처격 ‘良中(-아ᄒᆡ)’에 대해 중세국어 ‘-애/-에’
아래는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 1415년)에 나타나는 이두의 예이다.(밑줄이 이두 부분)
한 문
蠶陽物大惡水故食而不飮 / 한 문 |
蠶段陽物是乎等用良水氣乙厭却桑葉叱分喫破爲遣飮水不冬 / 이두문 |
蠶딴 陽物이온들쓰아 水氣을 厭却 桑葉뿐 喫破하고 飮水안들 /한글표기 |
누에는 양물이므로 물기를 싫어해 뽕잎만 먹고 물을 마시지 않는다. /현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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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9
삼국유사 1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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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1 도솔가-월명사
2008/08/22 온달
2008/08/23 혜성이가 - 혁천사
2008/08/27 도천수관음가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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衆人唱海歌 詞曰
여러 사람들이 <해가(海歌)>를 불렀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 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 남의 부인을 앗아간 죄가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 만약에 거역하여 내놓지 않는다면
入網捕掠燔之喫』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 먹으리.
老人獻花歌曰,
<노인헌화가>는 다음과 같다.
紫-布-岩乎-辺-希
執-音-乎-手-母-牛-放 -敎-遣
吾-肹-不-喩-慚-肹-伊-賜-等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
[양주동역]
딛배 바회 가해 자줏빛 바위 끝에
자바온손 암쇼 노해시고 잡으온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흘 안디 붓그리샤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곶흘 것가 받자보리이다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8619?category=485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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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9 보현행원품도입부
2008/08/29 균여 분류된 향가
- 2008년 8월 28일 바다에서 허황후 오시다
보현 행원품 (Puxian 상품을 원하는) 게송
https://kydong77.tistory.com/7974?category=485793
- 2008/08/30 1. 예경제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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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룡운, 나룻배와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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