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의의 이두는 구결, 향찰 등을 포함하여 한자를 빌려 이뤄진 한국어 표기법 전체를 가리킨다. 협의의 이두는 이두문에 나타나는 한국어의 한자 표기를 이른다. 이두문이란 이서(吏胥)들이 행정 문서를 작성할 때 사용한 한자 표기의 산문을 이르는데 같은 문체로 쓰인 민간의 글도 이두문이라 부른다. 여기서는 협의의 이두에 관해 언급한다.
이두의 성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신라시대에 시작하여 남북국 시대에 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자료에는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는 기술이 나오지만 진평왕 때의 서동요나 진흥왕의 순수비문에 쓰인 것이 있어 설총이 창작한 것은 아니고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5세기부터 고구려에서는 한문을 한국어 어순으로 재배치하거나, ‘之’자를 문장의 종결어미로 사용했다.[1]고구려와 백제에서는 6세기 말 이후 차자 표기법 (이두)이 정체 또는 퇴조하였고, 신라에서는 반대로 6세기 말부터 7세기로 접어들면서 표기법상의 큰 발전을 이루었다.[1]
표기법
이두문에서는 명사, 동사 어간 등 단어의 실질적 부분에서 주로 한자어가 사용되고, 조사(助詞)나 어미(語尾) 등 문법적 부분에서 주로 이두가 사용되었다.(명사, 동사 부분에서 이두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음) 한반도에서는 한자를 도입한 뒤에 한동안은 정규 한문만 사용되었다고 추측되는데, 그 후 한국어 어순에 맞춰 글을 쓴 서기체(誓記體)와 같은 의사한문(擬似漢文)이 나타난다. 이두는 이와 같이 한국어 어순으로 쓰인 의사한문에 문법적 요소가 더 보완되어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두는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는데, 한자 독법은 옛날부터 있는 관습적인 독법이 내려와 있다. 그 중에는 중세 한국어와도 다른 독특한 것도 있다. 예) 처격 ‘良中(-아ᄒᆡ)’에 대해 중세국어 ‘-애/-에’
아래는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 1415년)에 나타나는 이두의 예이다.(밑줄이 이두 부분)
아버지는 원효대사 설서당(薛誓幢)이며 어머니는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이다. 자(字)는 총지(聰智)이며 경주 설씨 시조 호진(虎珍)의 후손으로, 설총은 경주 설씨의 중시조이다. 한글 이전 고대 한국어의 표기법인 이두(吏讀)를 집대성했으며, 신라에 유교를 확립시킨 뛰어난 유학자로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강수(强首), 후대의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삼현으로 추앙받았다.
아버지 원효대사가 승려 출신[1]인 것은 여러모로 유명하지만 설총은 아버지와 달리 유학자였다. 단, 비슷한 시대의 또다른 대표적 유학자 강수가 불교를 세속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하며 유교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던 것과 달리 설총은 아버지 원효의 영향을 받았다.
설총의 탄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고승 원효(본명 설서당)[2]라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가 해골물을 먹고 당나라유학을 포기한 뒤에 노래를 지어 불법을 전했는데 갑자기 그가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지을 텐데"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아무도 원효가 부르는 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하던 중, 태종 무열왕이 이를 듣고서는 "원효가 자기한테 여자를 주면 뛰어난 현자를 낳게 하겠다라는 거로구나"라고 하고선 원효를 자신의 과부된 딸[3]인 요석공주와 맺어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관리를 보내 원효를 데려오게 했는데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던 원효가 일부러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져버렸다. 관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려가서 옷을 말리게 했는데,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다가 요석궁에 있던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보냈고 그래서 나온 아들이 바로 설총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설총은 무열왕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고려 광종 연간에 균여(均如)가 지은 향가.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원왕가(願往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원왕가(願王歌)’만이 ≪균여전≫의 문헌 명칭이고, 나머지는 ≪균여전≫의 ‘보현십종원왕에 의거하여 노래 11장을 지었다(依普賢十種願王 著歌十一章)’는 기록에 의한 후대의 명명이다.
작품은 고려대장경 보판(補板) ≪석화엄교분기원통초 釋華嚴敎分記圓通抄≫ 권10 끝에 부록으로 실린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병서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並序>의 제7 가행화세분(歌行化世分)에 향찰로 표기되어 전한다.
창작연대는 963∼967년 사이로 여러 설이 있다. 균여는 ≪균여전≫에 인용된 글에서 ≪화엄경≫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의 어려운 종취(宗趣)를 향가를 빌려 중생을 교화하고자 한다고 창작동기를 밝히고 있다. 전체 11수로 되어 있으며, 각 수 모두가 11분절로 띄어져 있다.
체재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기초하여, 그 10행원의 순서를 그대로 하고, 제목은 ‘○○○○품’을 ‘○○○○가’로 고치고 그 밖의 다른 글자는 거의 그대로 쓰면서 10수의 향가를 창작한 다음에, <총결무진가 總結无盡歌>를 더하여, 전체 11수로 짜고 있다.
전체 내용은 보현보살이 제시한 열 가지 원을 작자 스스로 행하고자 다짐하는 것이다. <보현십원가>의 각 작품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경제불가 禮敬諸佛歌>는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고 예배하겠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예경제불가>의 원문, 해독, 현대어 풀이는 다음과 같다.
① 원문
心未筆留/
慕呂白乎隱佛體前衣/
拜內乎隱身萬隱/
法界毛叱所只至去良/
塵塵馬洛佛體叱刹亦/
刹刹每如邀/里白乎隱/
法界滿賜隱佛體/
九世盡良禮爲白齊/
歎曰 身語意業无疲厭/
此良夫作沙毛叱等耶
② 해독
ᄆᆞᅀᆞᄆᆡ 부드로/
그리ᄉᆞᆯᄫᅩᆫ 부텨 알ᄑᆡ/
저ᄂᆞ온 모마ᄂᆞᆫ
法界 업ᄃᆞ록 니르거라
塵塵마락 부텻 刹이역/刹刹마다 모리ᄉᆞᆯᄫᅩᆫ
法界 ᄎᆞ신 부텨/九世 다ᄋᆞ라 절ᄒᆞᄉᆞᆲ져
아야, 身語意業无疲厭/
이렁 ᄆᆞᄅᆞ 지ᅀᅡ못ᄃᆞ야
(김완진 해독)
③ 현대어 풀이
마음의 붓으로/
그리온 부처 앞에/
절하는 몸은/
法界 없어지도록 이르거라/
티끌마다 부첫 절이며/
절마다 뫼셔 놓은/
法界 차신 부처/
九世 내내 절하옵저/
아아, 身語意業无疲厭/
이리 宗旨 지어 있노라 (김완진 현대역)
<칭찬여래가 稱讚如來歌>는 여래불의 공덕을 칭송하는 노래로, 칭송자의 혀에 무한한 능력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광수공양가 廣修供養歌>는 넓게 여러 가지 공양을 모두 행하겠다는 내용으로, 그 많은 공양 중에서도 물질공양이 아닌 몸으로 하는 법공양이 으뜸임을 강조한다.
<참회업장가 懺悔業障歌>는 유일하게 보현행원품의 참제업장(懺除業障)이라는 제목을 고친 노래로, 그 내용은 오늘의 참회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수희공덕가 隨喜功德歌>는 어느 누구의 공덕이라도 이는 곧 나의 공덕이 되니, 그 모든 공덕을 따라 기뻐하겠다고 한 노래이다.
<청전법륜가 請轉法輪歌>는 법륜(중생의 악을 부수는 설법)을 굴리도록 청하는 노래로, 그 내용은 부처님의 은혜로 중생이 깨달은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 준다. <청불주세가 請佛住世歌>는 부처님이 비록 이 세상과 인연을 다하여 서방으로 가려고 할지라도 가지 말고 이 세상에 계속 머물면서 중생을 구제해 주도록 갈구하는 내용이다.
<상수불학가 常隨佛學歌>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겠다는 노래로, 부처님이 닦으신 어렵고 괴로운 수행을 좇고자 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다짐한다.
<항순중생가 恒順衆生歌>는 항상 중생을 따르겠다는 내용으로, 부처님도 중생으로 뿌리를 삼으셨으니 자신도 그렇게 중생을 따르겠다고 노래하고 있으며,
<보개회향가 普皆廻向歌>는 자신이 닦은 모든 공덕의 선을 중생에게 돌려, 중생에도 미혹한 무리가 없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총결무진가>는 앞의 10수를 묶어 결론짓는 노래로, 생계(生界) 다하면 자신이 바라는 바도 다할 날이 있으리니, 보현행원만을 열심히 행하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이 내용들은 작품별 유형으로 보면,
<예경제불가>·<칭찬여래가>·<광수공양가>·<참회업장가>·<수희공덕가> 등이 속하는 바람(1)↔바람(2)→맹서의 유형,
<청전법륜가>이 내용들은 작품별 유형으로 보면, <예경제불가><칭찬여래가><광수공양가><참회업장가><수희공덕가> 등이 속하는 바람(1)↔바람(2)→맹서의 유형,
<청전법륜가>·<청불주세가> 등이 속하는 맹서→바람(1)↔바람(2)의 유형,
<상수불학가>·<항순중생가>·<보개회향가> 등이 속하는 바람→맹서(1)↔맹서(2)의 유형,
<총결무진가>가 속하는 (바람→)맹서(1)→(바람→)맹서(2)→(바람→)맹서(3)의 유형 등으로 나뉜다.
[균여전소재 11首]
普賢十願歌(均如大師)
◇普賢菩薩十種願王歌(原題)
(1)균여전의 구성(全九章)
①降誕靈驗分 ②出家請益分 ③姉妹齊賢分
④立義定宗分 ⑤解釋諸章分 ⑥感通神異分
⑦歌行化世分⑧譯歌現德分⑨感應降魔分
(2)⑦歌行化世分
-均如大師(923-973, 고려 太祖6- 고려 光宗24) 창작은 949-973년으로 추정.
◇普賢十願歌 11수
①禮敬諸佛歌②稱讚如來歌③廣修供養歌
④懺悔業障歌⑤隨喜功德歌⑥請轉法輪歌
⑦諸佛住世歌 ⑧常隨佛學歌 ⑨恒順衆生歌
⑩普皆廻向歌⑪總結無盡歌
(3)⑧譯歌現德分
-漢詩로 飜譯한 崔行歸의 序(983). 七言律詩.
(4)均如傳[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 고려 문종 29년(1075) 赫連挺 撰.
[참조]均如(俗姓은 邊氏, 黃州출신,923-973.고려 太祖6- 고려 光宗24)) 향가 11수는 고려시대의 작품. 광종(재위 949-975) 949-973년으로 추정.
[참고]
崔行歸의 序(983)에 나타난 보배로운 말씀들
[第七 歌行化世分者]
師之外學 尤閑於詞腦(意精於詞 故云腦也)
균여대사는 불교 외의 학문으로는 특히 사뇌(지은이의 뜻이 가사에 정밀하게 표현되므로 腦)라 한다)에 익숙하여
어머니는 점명(占命). 얼굴이 못생겨서 부모는 그를 거리에 버렸으나 두 까마귀가 날개로 그를 덮는 것을 보고 부모는 회개하여 다시 데려다 길렀다 함. 그는 7세 시절을 전후한 어릴 때부터 《원만게(圓滿偈)》를 즐겨 읽었고 15세 때 부흥사(復興寺) 식현화상(識賢和尙)에게 학문을 배워 뒤에 영통사(靈通寺)에서 의순(義順)의 문인으로 수도에 힘썼다. 한편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노력하여, 향가 <보현십원가> 11수를 지어 이 노래 속에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어 넣었다. 불교계의 종파 통합에도 힘을 기울여 관혜(觀惠)의 남악파(南岳派)와 희랑(希朗)의 북악파(北岳派)의 통합을 위해 인유(仁裕)와 함께 대찰(大刹)의 승려를 찾아 설득하고 민간을 순회, 설교하여 종파간의 분쟁을 끝내게 했다. 958년(광종 9)에는 시관(試官)이 되어 유능한 승려들을 많이 선발했다. 법계(法階)는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에 이르렀다. 한때 오관산(五冠山) 마하갑사(摩詞岬寺)에 있었으며, 963년(광종 14) 왕이 그를 위해 창건한 귀법사(歸法寺)에서 주지로 있다가 죽었다. 그가 지은 향가 <보현십원가>는 불교 문학의 일대 결정(結晶)으로서 혁련정(赫蓮挺)이 지은 <균여전>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 고려 초기의 고승 균여대사가 지은 향가 11수.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십종원왕(十種願往)에 의해 지은 작품. 노래는 모두 향찰로 적혀 있으며, 형식은 10구체, 원래 '보현'의 원명 범음(梵音)은 삼만다발타라(三曼多跋陀羅, Samantabhadra)이며, '보'는 덕리주편(德利周編), '현'은 인자혜오(仁慈惠悟)의 뜻을 가졌고, 보현은 보살의 이름이다. 문수보살(文殊菩薩)과 함께 석가(釋迦)를 모시고 그 옆에 있음. 흰코끼리를 타고 부처의 오른쪽에 있으며, 연명의 덕이 있기 때문에 '연명보살'이라고도 함. <보현십원가> 11수는 모두 혁련정이 지은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 균여전> 제7가행화세분(歌行化世分)에 실려 있음. 그 11수의 이름을 들면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 <참회업장가(懺悔業障歌)> <수희공덕가(隨喜功德歌)> <청전법륜가(請轉法輪歌)> <청불주세가(請佛住世歌)> <상수불학가(常隨佛學歌)> <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 <보개회향가(普皆廻向歌)> <총결무진가(總結无盡歌)> 등이다.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님 앞에 절하옵는 이 내 몸아 법계의 끝까지 이르러라. 티끌마다 부처님의 절이요, 절마다 모시옵는 법계에 가득 찬 부처님 구세가 다하도록 예경하고 싶어라. 아! 이 몸과 말과 뜻은 쉼 없이 오로지 부처님을 사모하고 싶습니다.” (예경제불가) “잘못되어 깨달음을 향한 길을 잃고 지은 죄업은 법계에 넘치옵니다. 나쁜 버릇에 떨어진 삼업은 계율로 깨끗이 하리니 오늘 저희들의 모든 참회를 시방세계의 부처님은 아옵소서. 아, 중생계가 다하도록 나의 참회도 다하여 내세에 길이 죄업을 버리고저” (참회업장가)
찬탄과 비판
“화엄경의 10만 게송이 인도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오로지 용수보살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우리나라에서의 처음 불려지게 된 것은 오로지 의상대사의 덕분이요, 고려에서 비로소 널리 불려지게 된 것은 오로지 균여대사의 덕분이다.” (고려 혁련정) “(균여 스님의) 말은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이치는 변통이 없어서 우리 조사의 도를 황폐케 하고 후생들을 현혹시키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고려 의천 스님) “보현행원가는 높지도 않고 얕지도 않는, 또한 너무 깊지도 않고 멀지도 않는 중생의 적당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원(大願)이었다. 이것은 균여의 마음이 곧 보현의 마음이요 이 보현의 마음이 곧 중생의 마음, 즉 대중의 마음의 경지에서 노래한 격조있는 시가라 아니할 수 없다.” (전 동국대 교수 운학 스님) “관행을 강조한 의천의 불교가 균여의 그것보다 더 실천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또 의천에게서는 균여만큼 서민사회 속에 화엄을 유포시키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은 사실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 최병헌 교수)
특히 균여는 대중 교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향가인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를 지었는데, 이것은 화엄의 실천행을 고려 민중들에게 권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는 당시에 이미 담벼락에 쓰여질 정도로 널리 알려졌으며, 최행귀에 의해서 한시로 번역되어 중국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후 고려 문종 29년(1075) 혁연정(赫連挺)은 일곱 장을 추가한 끝에 드디어 균여대사의 전기 均如傳[약칭, 원제: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을 편찬하였던 것이다. 향가 11수, 한역가 11수, 균여전 등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쳐 우리는 그 전모를 알 수 있으니 어느 분의 노고도 결코 가볍다 할 수 없다. 원작이 없었다면 한역가도 없었을 것이요, 한역가가 없었다면 향찰로 표기된 원작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요, 이 두 개의 장이 없다면 균여전의 전기는 승려 한 분의 일대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의 할 것은 향가라면 으레 신라시대의 노래인데, 여기 보현십원가의 향가 11수는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다음 꼭지에서부터 향가, 한역가,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묶어 한 작품씩 살펴보고자 한다.
[균여전소재 11首]
普賢十願歌(均如大師)
◇普賢菩薩十種願王歌(原題)
(1)균여전의 구성(全九章)
①降誕靈驗分 ②出家請益分 ③姉妹齊賢分
④立義定宗分 ⑤解釋諸章分 ⑥感通神異分
⑦歌行化世分⑧譯歌現德分⑨感應降魔分
(2)⑦歌行化世分
-均如大師(923-973, 고려 太祖6- 고려 光宗24) 창작은 949-973년으로 추정.
◇普賢十願歌 11수
①禮敬諸佛歌②稱讚如來歌③廣修供養歌
④懺悔業障歌⑤隨喜功德歌⑥請轉法輪歌
⑦諸佛住世歌 ⑧常隨佛學歌 ⑨恒順衆生歌
⑩普皆廻向歌⑪總結無盡歌
(3)⑧譯歌現德分
-漢詩로 飜譯한 崔行歸의 序(983). 七言律詩.
(4)均如傳[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 고려 문종 29년(1075) 赫連挺 撰.
[참조]均如(俗姓은 邊氏, 黃州출신,923-973.고려 太祖6- 고려 光宗24)) 향가 11수는 고려시대의 작품. 광종(재위 949-975) 949-973년으로 추정.
[참고]
崔行歸의 序(983)에 나타난 보배로운 말씀들
[第七 歌行化世分者]
師之外學 尤閑於詞腦(意精於詞 故云腦也)
균여대사는 불교 외의 학문으로는 특히 사뇌(지은이의 뜻이 가사에 정밀하게 표현되므로 腦)라 한다)에 익숙하여
1권 또는 2권. 40권본 『화엄경』 안에 수록되어 있으며, 정식 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다. 이 책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문수보살(文殊菩薩)에 의해 보리심(菩提心)주1을 내어 53 선지식(善知識)을 차례로 찾아가서 도를 묻고,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찾았을 때 보현보살이 설한 법문을 담고 있다.
내용
우리 나라에서는 옛부터 보현보살의 행원주2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방대한 『화엄경』에서 따로 분리시켜서 이 한 품을 별도 책으로 간행, 유포시켰다.
그 내용은 부처의 공덕을 성취하고자 하면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행원을 닦아야 함을 밝힌 것이다. 먼저 보현보살의 10대원이,
그런 후에 이들 열 가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하나씩 구분하여 밝히고 있다. 즉 예배 · 찬탄 · 공양 · 참회 등 어느 하나를 행할지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행하되 허공계(虛空界)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업(衆生業)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 때까지 행하여야 하며, 그 생각이 끊어짐이 없을 뿐 아니라 몸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10대원의 실천이 지니는 공덕이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음과, 이 10대원을 듣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하여 설하는 사람의 공덕이 어떠한지를 밝힌 뒤, 이 모든 사람들이 마침내 생사에서 벗어나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됨을 밝혔다.
본문에 이어서 보현보살이 본문의 뜻을 요약하여 읊은 게송(偈頌)을 수록하였다. 마지막으로 선재동자를 비롯한 수많은 불제자들이 이를 받들어 행하였음을 밝히고 끝을 맺었다.
이 책은 불교의 신행(信行)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구체적이고도 쉽게 밝히고 있다. 화엄종이 크게 교세를 떨쳤던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이 책의 실천을 중요시하였고, 고려의 균여(均如)는 이 책을 근거로 하여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를 지어 유포하였다. 그리고 선종에서는 이 행원품을 근거로 하여 「예불대참회문(禮佛大懺悔文)」을 만들었으며, 우리 나라 선종에서는 보현행원사상이 집결된 이 참회문을 저녁마다 외우면서 108배의 절을 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